7월 30일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왼쪽·상자 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에서 해외 동포들과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전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때쯤 장관급인 국가경제개발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된 김양국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동생으로 그 존재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북한은 4월 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경제개발구 창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김정은 정권이 활발하게 추진하는 경제 개선 조치 가운데 하나로 외국 자본을 유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5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경제개발구법을 제정했다. 법 제정 이후 어떤 후속 조치가 마련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북한은 7월 말 결과물을 내놨다. 국가경제개발위원회(경제개발위)라는 새로운 경제기구를 설립한 것이다.
외국 자본 유치 의지 표명
경제개발위 수장은 장관급이다. 수장으로 임명된 2명이 눈길을 끈다. 김양국과 김기석 위원장이다. 김양국은 김양건 조선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동생이고, 김기석은 전 합영투자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김양건 부장은 북한에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김양건 부장은 최근 개성공단 관련 발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재미교포 대북 사업가인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김 부장의 발언을 전했다. 김 부장이 “개성공단이 잘되면 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 조성도 잘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 조성은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것이다.
경제개발위 당 비서에 김양국을 임명한 것은 김양건 부장의 입지가 여전히 공고함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최근 김 부장의 북한 내 입지가 흔들린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이는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됐다. 최근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는 2013 동아시안컵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을 만났다. 북한 매체들은 이 장면을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김정은 제1비서의 수행 인사에는 김 부장도 포함됐다. 그런데 김 부장의 모습이 사진으로는 나왔는데 수행자 명단에서는 빠진 채 보도됐다.
이를 두고 개성공단 사태 등을 비롯해 대남 현안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북한이 대남 총책인 김 부장에게 일종의 경고성 조치를 내렸다는 분석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김 부장의 동생이 경제개발위 수장에 오름으로써 설득력을 잃게 된 셈이다.
김기석 위원장은 합영투자위원회 부위원장 시절, 외자 유치 공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합영투자위원회는 북한의 대외투자 유치 창구로 2010년 7월 발족했다. 발족 당시에는 1위원장, 4부위원장 체제였던 것이 2012년 상반기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투자 유치 확대를 위해 부위원장 수를 7명으로 늘리며 7부위원장 체제로 바꾼 것이다. 경제개발위가 신설되면서 합영투자위원회는 경제개발위 산하기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북한은 김양국 당 비서와 김기석 위원장 외에도 힘 있고 유능한 인사를 경제개발위에 집중 배치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 경제개발위 조직 및 인사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중요한 문건을 입수했다. 북한이 5월 29일 제정한 경제개발구법 전문이다. 15쪽짜리 문건이다. 문건을 입수한 이후 확인해보니 이 법 전문은 6월 15일자 북한 주간지 ‘통일신보’를 통해 한 차례 공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북한 매체의 보도이다 보니 국내에서는 전문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이번 문건을 입수한 직후 필자는 과거의 흥분이 되살아났다. 2012년 2월과 3월 북한의 14개 경제법 전문을 단독 입수해 수차례 보도한 바 있다. 이들 14개 법 전문은 북한이 2012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전후에 제정 또는 개정한 것이었다. 1년여 만에 다시 경제법 전문을 손에 넣으니 14개 법 전문 입수 때의 짜릿함이 떠오른 것이다.
북한판 실리콘밸리 조성
경제개발구법은 모두 7개 장으로 구성됐다. 제1장에서는 경제개발구법의 기본을 설명하고 있다. 제2장부터 제5장까지는 경제개발구의 창설과 개발, 관리, 경제개발구에서의 경제활동을 규정한다. 그리고 제6장과 7장에서는 경제개발구의 각종 특혜와 분쟁 해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경제개발구를 ‘국가가 특별히 정한 법규에 따라 경제활동에 특혜가 보장되는 특수경제지대’라고 정의했다. 특구인 셈이다. 경제개발구 유형으로는 ‘공업·농업·관광 개발구, 수출가공구, 첨단기술개발구 같은 경제 및 과학기술 분야 개발구’로 제시했다.
또 경제개발구의 관리 원칙으로 4가지를 들었다. ‘법규의 엄격한 준수와 집행, 기업의 독자성 보장, 경제활동에 대한 특혜 제공, 국제 관례의 참고’ 등이다. 법 전체적으로 보면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투자 기업의 처지를 많이 반영하고, 국제적 기준을 고려했다. 이는 북한이 2012년 말 제·개정한 나선경제지대법 등 14개 경제법과 유사하다.
조봉현 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정책팀장은 법 전문을 분석한 이후 몇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첫째, 경제개발구를 중앙급과 지방급으로 구분한 점이다. 이는 우리의 국가산업단지, 지방산업단지와 유사한 개념이다. 지방급 경제개발구의 경우 해당 지방인민위원회 등 지방에 권한을 준 것이 특이하다. 그만큼 중앙급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경제개발구의 유형에 수출가공구를 넣은 것과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은 상품 생산 부문의 투자를 특별히 장려한 대목이다. 이는 수출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려는 일종의 수출지향주의를 채택한 의미가 있다.
셋째, ‘경제개발구의 지역 선정 원칙’으로 4가지를 제시하면서 그중 하나로 ‘주민 지역과 일정하게 떨어진 지역’을 든 부분이다. 경제특구 개발이 주민 지역에 인접할 경우 주민에게 영향 등 북한 체제에 미칠 부작용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7월 말 평양과 원산, 금강산 지역을 방문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을 통해 최근 북한의 모습이 공개됐다. 사진은 원산 인근 마식령 리조트 공사장 모습.
다섯째, 경제개발구의 토지 임대 기간을 최대 50년까지로 지정한 점이다.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아 남한을 배제한 채 중국이 특구개발에 참여하게 된다면 향후 남북관계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북한의 주요 지역이 중국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통일을 맞이한다면 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필자의 취재원은 북한 경제개발위가 중앙급으로는 총 13개 특구를, 지방급으로는 220개 지역의 개별 경제개발국을 관리한다고 전해왔다. 지방급 경제개발구는 도와 시 등 전국 220개 지역에 개별 경제개발국을 설치해 운영하도록 했다. ‘개성 인삼’처럼 각 지역별 특성에 맞는 자체 개발구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제사회의 신뢰
북한의 경제개발구법 전문.
관광 특구는 4곳으로 기존 금강산 관광 특구 외에 칠보산, 백두산, 원산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원산은 김정은 제1비서가 마식령 스키장 건설 현장을 비롯한 각종 개발 현장을 직접 방문해 관심을 끌었다. 또 최근 평양과 원산 등을 방문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원산은 관광 특구로 변모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목격담을 전했다. 박 사장은 “어쩌면 김정은 제1비서가 마식령이나 원산에 특구를 열면서 자기 역량이나 능력을 인민들로부터 테스트받기 위한 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관광 특구 개발을 위해 북한은 경제개발위 산하에 국가관광총국을 별도로 설치했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2012년 7, 8월에 보도했던 필자의 두 가지 기사가 떠올랐다. ‘북, 신의주·남포·해주 특구 개방 추진’과 ‘북한, 홍콩식 신의주 특구 추진, 중국 동의’가 그것이다. 전자는 북한이 서해에 인접한 신의주와 남포, 해주 3개 지역을 특구로 추가 개방한다는 내용이다. 후자는 ‘북한이 2002년 계획했다 실패한 신의주 특구 사업을 홍콩 기업과 추진한다. 북한은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중국 방문 기간 이를 중국 측에 설명했고, 중국은 국가 돈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보도에 대해 주변에서는 “너무 앞서간다. 북한이 과연 그런 식으로 가겠나”라는 불신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 북한이 나아가는 방향은 당시 보도와 일치한다.
국제 기준에 어울리는 법규 제정과 이에 따른 고위급 경제기구 신설, 적극적인 특구 개발 의지…. 일련의 진행 과정을 보면 김정은 정권은 외국 자본 유치 등 경제 개선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과거에는 볼 수 없던 행보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국제사회가 북한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명확하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전혀 소용없다는 이치인 것이다. 개성공단 사태를 겪으면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돈을 쥐고 있는 이들의 돌아선 마음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문제는 신뢰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