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간과 과거 시간은 둘 다 아마도 미래 시간에 현존하고, 미래 시간은 과거 시간에 담겨 있으리라.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은 하나의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하나의 추상이다. 있을 수도 있었던 것과 있었던 것은 언제나 현존하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중략) 또는 그 끝이 그 시작 앞에 있고, 그 끝과 시작이 그 시작 이전과 그 끝 후에 항상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은 영원한 현재다.”
‘황무지’와 함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네 개의 사중주’라는 제목의 시 일부다. 시인은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작품번호 131을 듣고 이 시를 썼다. 영화 ‘마지막 4중주’(감독 야론 질버먼)에서 첼리스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 분)는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이 시를 인용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베토벤 작품 131번부터 시작할 겁니다. 이 곡은 7악장으로 구성됐으며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엔 중간에 멈출 수도, 쉴 수도, 조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악기는 분명 제각각 음이 엇나갈 것입니다. 베토벤은 우리 인생을 이루는 막 사이에서 일관성과 통합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려 한 걸까요? 과연 우리 인생이 정해진 음으로부터 이탈해버린다면 거기서 멈춰서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마지막까지 계속해야 할까요? 나도 모릅니다.”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영화 주제가 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은 베토벤이 죽기 반 년 전 작곡한 것으로, 그가 좋아했던 곡이자 후대 음악가들이 최고로 평가하는 작품이다. 4악장으로 이뤄진 여느 현악4중주와 달리 각기 다른 길이와 템포, 형식으로 된 7악장으로 이뤄졌으며, 쉼 없이 연주하도록 돼 있다. 야론 질버먼 감독은 “이는 연주자들이 중간에 악기를 다시 조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주하는 동안 악기 음은 어긋나고 하모니는 엉망이 된다.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혼돈으로 빠지는 우리 인생의 관계가 바로 이렇지 않은가”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악보를 벗어나고 선율에서 이탈하는 악기 소리처럼, 누군가와 반드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 욕망은 때때로 다른 이와 갈등하고 충돌한다. 그것이야말로 3류 유행가 가사부터 심오한 철학이론까지 관통하는 삶의 통속성일 것이다.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처럼 우리 삶은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으며, 악기처럼 단번에 조율되지도, 컴퓨터처럼 리포맷이나 리셋할 수도 없다. 엘리엇의 시는 과거 결과로서의 현재의 삶과, 예비된 미래 궤적으로서의 지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최후 연주곡으로 선택한 정상의 악단 ‘푸가’ 멤버 4명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연주하는 현악4중주. 그 형식은 클래식의 위대하고 숭고한 선율이지만, 내용은 고통과 욕망으로 이지러진 삶과 사랑의 통속성, 이른바 막장드라마다.
우스꽝스럽도록 슬픈 통속성
비올라는 제1바이올린과 가슴 뛰는 사랑을 했고, 제2바이올린으로부터 안정을 얻었으며, 첼로를 의지하고 흠모했다. 제2바이올린은 평생 제1바이올린의 그늘에 묻혀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악보에 매인 안전벨트를 풀고 모험과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제1바이올린 자리는 화려했고 엄격했으며, 첼로는 묵직하고 조화로웠다. 그렇게 보낸 현악4중주의 25년. 균열은 노쇠한 첼로로부터 왔다. 활이 가끔 떨었고, 현 위에서 멈칫했다. 갈 길을 잃고 튕겨나간 첼로 음은 제1바이올린의 활기 없는 자기도취를 조롱했고, 제2바이올린의 야심과 열등감을 자극했으며, 비올라의 사랑과 균형을 회의하게 했고, 첼로의 마지막 생을 비탄으로 몰고 갔다. 우아한 클래식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감상적인 막장드라마가 된 것이다.
푸가는 결성 25주년 기념 공연을 앞두고 있다. 3000회 이상 공연과 투어를 함께 해온 악단답게 최고 화음을 자랑하지만,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던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숨겨진 갈등이 조금씩 드러나고 완벽해보이던 균형은 깨지기 시작한다. 제2바이올린 주자인 로버트(필립 시모어 호프먼 분)는 단 한 번의 외도로 아내인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 분)과 결별 위기에 처한다. 아내를 향한 온전한 사랑을 의심받게 된 로버트는 가정생활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 아내의 옛 연인이자 동료이며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다니엘(마크 이바니어 분)에 대한 비난과 열등감이 폭발한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재현해내는 엄격한 곡 해석을 추구해온 다니엘은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삶과 음악에 대한 영감을 얻지만, 그의 사랑은 다른 단원들을 혼란으로 몰아간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피터의 병과 남편의 외도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줄리엣은 충격에 빠진다. 연주자로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한 피터는 이 모든 시련에도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선택하고 마지막 공연을 강행한다. 사제관계, 과거 연인과 연적, 음악적 라이벌, 현재의 부부에서 마침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얽히고설킨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우스꽝스럽도록 슬픈 삶의 통속성. 이 현악단은 다시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을까. 그 최후의 연주는 어떤 소리를 빚어낼까.
음악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한 연기파 배우 4명이 보여주는 관록의 연기가 눈부시다. 특히 최근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에서도 주연을 맡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황무지’와 함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네 개의 사중주’라는 제목의 시 일부다. 시인은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작품번호 131을 듣고 이 시를 썼다. 영화 ‘마지막 4중주’(감독 야론 질버먼)에서 첼리스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 분)는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이 시를 인용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베토벤 작품 131번부터 시작할 겁니다. 이 곡은 7악장으로 구성됐으며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엔 중간에 멈출 수도, 쉴 수도, 조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악기는 분명 제각각 음이 엇나갈 것입니다. 베토벤은 우리 인생을 이루는 막 사이에서 일관성과 통합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려 한 걸까요? 과연 우리 인생이 정해진 음으로부터 이탈해버린다면 거기서 멈춰서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마지막까지 계속해야 할까요? 나도 모릅니다.”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영화 주제가 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은 베토벤이 죽기 반 년 전 작곡한 것으로, 그가 좋아했던 곡이자 후대 음악가들이 최고로 평가하는 작품이다. 4악장으로 이뤄진 여느 현악4중주와 달리 각기 다른 길이와 템포, 형식으로 된 7악장으로 이뤄졌으며, 쉼 없이 연주하도록 돼 있다. 야론 질버먼 감독은 “이는 연주자들이 중간에 악기를 다시 조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주하는 동안 악기 음은 어긋나고 하모니는 엉망이 된다.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혼돈으로 빠지는 우리 인생의 관계가 바로 이렇지 않은가”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악보를 벗어나고 선율에서 이탈하는 악기 소리처럼, 누군가와 반드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 욕망은 때때로 다른 이와 갈등하고 충돌한다. 그것이야말로 3류 유행가 가사부터 심오한 철학이론까지 관통하는 삶의 통속성일 것이다.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처럼 우리 삶은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으며, 악기처럼 단번에 조율되지도, 컴퓨터처럼 리포맷이나 리셋할 수도 없다. 엘리엇의 시는 과거 결과로서의 현재의 삶과, 예비된 미래 궤적으로서의 지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최후 연주곡으로 선택한 정상의 악단 ‘푸가’ 멤버 4명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연주하는 현악4중주. 그 형식은 클래식의 위대하고 숭고한 선율이지만, 내용은 고통과 욕망으로 이지러진 삶과 사랑의 통속성, 이른바 막장드라마다.
우스꽝스럽도록 슬픈 통속성
비올라는 제1바이올린과 가슴 뛰는 사랑을 했고, 제2바이올린으로부터 안정을 얻었으며, 첼로를 의지하고 흠모했다. 제2바이올린은 평생 제1바이올린의 그늘에 묻혀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악보에 매인 안전벨트를 풀고 모험과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제1바이올린 자리는 화려했고 엄격했으며, 첼로는 묵직하고 조화로웠다. 그렇게 보낸 현악4중주의 25년. 균열은 노쇠한 첼로로부터 왔다. 활이 가끔 떨었고, 현 위에서 멈칫했다. 갈 길을 잃고 튕겨나간 첼로 음은 제1바이올린의 활기 없는 자기도취를 조롱했고, 제2바이올린의 야심과 열등감을 자극했으며, 비올라의 사랑과 균형을 회의하게 했고, 첼로의 마지막 생을 비탄으로 몰고 갔다. 우아한 클래식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감상적인 막장드라마가 된 것이다.
푸가는 결성 25주년 기념 공연을 앞두고 있다. 3000회 이상 공연과 투어를 함께 해온 악단답게 최고 화음을 자랑하지만,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던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숨겨진 갈등이 조금씩 드러나고 완벽해보이던 균형은 깨지기 시작한다. 제2바이올린 주자인 로버트(필립 시모어 호프먼 분)는 단 한 번의 외도로 아내인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 분)과 결별 위기에 처한다. 아내를 향한 온전한 사랑을 의심받게 된 로버트는 가정생활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 아내의 옛 연인이자 동료이며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다니엘(마크 이바니어 분)에 대한 비난과 열등감이 폭발한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재현해내는 엄격한 곡 해석을 추구해온 다니엘은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삶과 음악에 대한 영감을 얻지만, 그의 사랑은 다른 단원들을 혼란으로 몰아간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피터의 병과 남편의 외도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줄리엣은 충격에 빠진다. 연주자로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한 피터는 이 모든 시련에도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선택하고 마지막 공연을 강행한다. 사제관계, 과거 연인과 연적, 음악적 라이벌, 현재의 부부에서 마침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얽히고설킨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우스꽝스럽도록 슬픈 삶의 통속성. 이 현악단은 다시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을까. 그 최후의 연주는 어떤 소리를 빚어낼까.
음악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한 연기파 배우 4명이 보여주는 관록의 연기가 눈부시다. 특히 최근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에서도 주연을 맡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