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미국과 러시아가 인권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양국은 상대국을 겨냥한 인권법을 제정하면서 마치 냉전시대처럼 공방전을 벌인다. 이 같은 이른바 ‘인권전쟁’은 심각한 외교 분쟁으로 비화할 공산이 크다.
양국이 인권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인 계기는 2009년 11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 구치소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변호사 피살사건이다. 마그니츠키는 모스크바 로펌인 파이어스톤 던컨 소속 변호사로 영국 투자펀드 허미티지 캐피털의 이익을 대변했다. 2007년부터 탈세 혐의를 받은 허미티지 캐피털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조사를 벌이던 그는 러시아 내무부 고위 관리를 포함한 검찰, 경찰, 판사, 세관원들이 법인세 환급 영수증을 위조해 2억3000만 달러를 횡령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결국 비리 내용을 폭로했으나, 오히려 1700만 달러 탈세를 방조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2008년 11월 체포됐다. 그리고 구치소에 수감돼 1년 정도 조사받다 2009년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마그니츠키 법 vs 디마 야코블레프 법
사망 당시 37세였던 마그니츠키는 췌장염 등을 앓았지만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구치소 측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유족과 인권단체는 정확한 사인 규명을 촉구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 정부에 사인 규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2011년 11월 러시아 크렘린궁 특별조사위원회는 마그니츠키가 구치소에서 간수 8명에게 고무곤봉으로 폭행당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 검찰은 마그니츠키를 치료하지 않은 의무관 2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마그니츠키 죽음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관리들은 모두 승진하거나 훈장을 받았다.
마그니츠키 사망 2년 만에 사건 진상이 밝혀졌는데도 러시아 정부의 처리가 미흡하자 미국 의회에선 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 관리들을 제재하기 위한 법안 제정 움직임이 시작됐다. 미국 상하원 외교위원회는 2012년 6월 마그니츠키 피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 관리들의 미국 입국 금지 및 미국 내 자산 동결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마그니츠키 법(Magnitsky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러시아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 및 부패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에 대한 비자발급 금지와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도록 규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 상하원은 2012년 11월 16일과 12월 6일 마그니츠키 법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가결했으며, 12월 14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됐다. 이 법안 제정을 주도한 벤저민 카딘(메릴랜드 주)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법 제정으로 인권보호에 앞장서는 미국의 리더십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에서는 옛 소련 붕괴 이후 민주체제를 도입했음에도 그동안 상당한 인권 탄압이 자행됐다. 특히 2012년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세 번째 취임한 이후 러시아 정부는 불법집회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인터넷을 통제하는 등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푸틴을 비난하는 내용의 공연을 벌인 여성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 멤버 2명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러시아 의회는 7월 해외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시민단체에 ‘외국기관(foreign agent)’이라고 낙인찍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9월에는 러시아 정부가 대외원조기관인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반정부 시민단체의 배후라며 사실상 추방했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에서 각종 의료, 인권, 민주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91년 이후 4만5000여 아동 미국행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정부는 미국의 마그니츠키 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러시아 의회는 결국 이 법에 상응하는 법을 제정했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는 2012년 12월 21일 미국인의 러시아 아동 입양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인간의 기본 권리와 자유, 러시아 국민의 권리와 자유 훼손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대응조치에 관한 법’이란 이름을 가진 이 법은 러시아판 미국인권법으로, 러시아에선 ‘디마 야코블레프 법’이라고 부른다. 디마 야코블레프는 2008년 미국에서 양아버지가 한여름 자동차 안에 9시간 동안 방치해 사망한 생후 21개월 된 러시아 출신 입양아 이름이다. 미국인 양아버지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20년간 미국인 양부모가 살해한 러시아 입양아는 모두 19명이다.
디마 야코블레프 법은 러시아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러시아인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를 저지른 미국인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이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미국인의 러시아 입국을 금지하고 러시아 내 자산을 동결할 것을 규정한다. 특히 미국인의 러시아 아동 입양 금지는 물론, 입양아 선발과 인도 절차를 담당하는 미국 기관의 러시아 내 활동을 불법화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거나 러시아 이익에 위협이 되는 프로젝트, 프로그램, 기타 활동을 추진하는 비정부기구의 러시아 내 활동도 금지했다. 이 법은 2012년 12월 26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며 12월 28일 푸틴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올해 1월 1일 발효됐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러시아 출신 입양아가 사는 가정을 러시아 정부 관리가 방문하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이 법은 미국에 대한 합당한 대응”이라고 강조했다.
이 법에 따라 새해부터 러시아 아동의 미국 입양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됐다. 미국과 러시아가 2010년 체결해 2012년 11월 발효한 입양 관련 협정도 폐기됐다. 실제로 최근 미국행이 결정됐던 러시아 고아 46명이 출국하지 못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러시아 아동을 입양한 국가였다. 미국은 연간 러시아 아동 1000~3000명을 입양했으며, 지난 20년간 6만 명을 입양했다. 2011년 러시아 전체 입양아 수는 1만800명으로, 이 가운데 3400명이 외국으로 갔다. 미국 956명, 이탈리아 798명, 스페인 685명, 프랑스 283명, 독일 215명, 아일랜드 129명, 이스라엘 87명 등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외국으로 입양된 러시아 아동은 4만5000여 명이나 된다. 현재 러시아에는 고아가 74만 명이고, 그중 아동보호시설에 수용된 인원은 8만3000여 명, 국내에 입양되는 숫자는 연간 7000명뿐이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는 국내 입양을 더욱 활성화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푸틴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내 입양 절차를 간소화하고 입양 부모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고아 보호 조치 관련 대통령령에 서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러시아 인권운동가들은 죄 없는 아이들을 정치문제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면서 이 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국 백악관도 성명을 내고 “모든 어린이에게는 가족에게 사랑받으면서 자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면서 “이들의 운명을 정치문제와 연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패트릭 벤트렐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러시아가 양국 간 입양을 중단하고 미국인과 협력하는 러시아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양국 관계 악화 ‘신냉전’ 돌입할 수도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인권전쟁을 계기로 크게 악화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선 양국이 ‘신(新)냉전’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크렘린궁 귀환’ 이후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갈수록 냉랭해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 5월 취임 직후 미국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 불참하고 6월 초 중국을 방문해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참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으며,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 주도의 이란 제재에 반대 의견을 밝히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은 시리아 사태를 놓고도 티격태격해왔다. 미국은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와의 군사 협력관계를 완전히 끊고 모든 무기 지원과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에 대한 외세의 무력 개입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시리아 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럽에 구축하려는 미사일방어체제(MD)에도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알렉세이 푸시코프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장은 “양국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면서 “이해관계가 너무 다르다. 장기적인 불신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마샤 리프만 카네기 모스크바센터 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 힘을 약화시키고 이익을 침해한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양국 관계 악화로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온 ‘리셋(Reset·재설정)’ 정책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던 시대는 오래전 끝났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인권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만큼 오바마 집권 2기와 푸틴 집권 3기 양국 관계가 다시 적대적으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리셋에 대해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면서 “미국이 인권을 핑계로 러시아를 압박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을 비롯해 시리아, 이란 등 각종 국제 현안에서 양국 간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는 이유는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 과정에서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략 때문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를 옛 소련과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야심을 지닌 만큼 미국과는 앞으로도 대립각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을 견제하려고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을 적극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2012년 말 연례 기자회견에서 “지금 러시아와 중국 간 신뢰 관계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라면서 “양국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새해에는 미국 대 중국·러시아 대결 구도가 본격화할 수도 있다.
양국이 인권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인 계기는 2009년 11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 구치소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변호사 피살사건이다. 마그니츠키는 모스크바 로펌인 파이어스톤 던컨 소속 변호사로 영국 투자펀드 허미티지 캐피털의 이익을 대변했다. 2007년부터 탈세 혐의를 받은 허미티지 캐피털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조사를 벌이던 그는 러시아 내무부 고위 관리를 포함한 검찰, 경찰, 판사, 세관원들이 법인세 환급 영수증을 위조해 2억3000만 달러를 횡령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결국 비리 내용을 폭로했으나, 오히려 1700만 달러 탈세를 방조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2008년 11월 체포됐다. 그리고 구치소에 수감돼 1년 정도 조사받다 2009년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마그니츠키 법 vs 디마 야코블레프 법
사망 당시 37세였던 마그니츠키는 췌장염 등을 앓았지만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구치소 측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유족과 인권단체는 정확한 사인 규명을 촉구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 정부에 사인 규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2011년 11월 러시아 크렘린궁 특별조사위원회는 마그니츠키가 구치소에서 간수 8명에게 고무곤봉으로 폭행당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 검찰은 마그니츠키를 치료하지 않은 의무관 2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마그니츠키 죽음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관리들은 모두 승진하거나 훈장을 받았다.
마그니츠키 사망 2년 만에 사건 진상이 밝혀졌는데도 러시아 정부의 처리가 미흡하자 미국 의회에선 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 관리들을 제재하기 위한 법안 제정 움직임이 시작됐다. 미국 상하원 외교위원회는 2012년 6월 마그니츠키 피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 관리들의 미국 입국 금지 및 미국 내 자산 동결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마그니츠키 법(Magnitsky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러시아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 및 부패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에 대한 비자발급 금지와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도록 규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 상하원은 2012년 11월 16일과 12월 6일 마그니츠키 법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가결했으며, 12월 14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됐다. 이 법안 제정을 주도한 벤저민 카딘(메릴랜드 주)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법 제정으로 인권보호에 앞장서는 미국의 리더십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에서는 옛 소련 붕괴 이후 민주체제를 도입했음에도 그동안 상당한 인권 탄압이 자행됐다. 특히 2012년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세 번째 취임한 이후 러시아 정부는 불법집회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인터넷을 통제하는 등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푸틴을 비난하는 내용의 공연을 벌인 여성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 멤버 2명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러시아 의회는 7월 해외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시민단체에 ‘외국기관(foreign agent)’이라고 낙인찍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9월에는 러시아 정부가 대외원조기관인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반정부 시민단체의 배후라며 사실상 추방했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에서 각종 의료, 인권, 민주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91년 이후 4만5000여 아동 미국행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정부는 미국의 마그니츠키 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러시아 의회는 결국 이 법에 상응하는 법을 제정했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는 2012년 12월 21일 미국인의 러시아 아동 입양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인간의 기본 권리와 자유, 러시아 국민의 권리와 자유 훼손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대응조치에 관한 법’이란 이름을 가진 이 법은 러시아판 미국인권법으로, 러시아에선 ‘디마 야코블레프 법’이라고 부른다. 디마 야코블레프는 2008년 미국에서 양아버지가 한여름 자동차 안에 9시간 동안 방치해 사망한 생후 21개월 된 러시아 출신 입양아 이름이다. 미국인 양아버지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20년간 미국인 양부모가 살해한 러시아 입양아는 모두 19명이다.
디마 야코블레프 법은 러시아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러시아인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를 저지른 미국인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이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미국인의 러시아 입국을 금지하고 러시아 내 자산을 동결할 것을 규정한다. 특히 미국인의 러시아 아동 입양 금지는 물론, 입양아 선발과 인도 절차를 담당하는 미국 기관의 러시아 내 활동을 불법화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거나 러시아 이익에 위협이 되는 프로젝트, 프로그램, 기타 활동을 추진하는 비정부기구의 러시아 내 활동도 금지했다. 이 법은 2012년 12월 26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며 12월 28일 푸틴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올해 1월 1일 발효됐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러시아 출신 입양아가 사는 가정을 러시아 정부 관리가 방문하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이 법은 미국에 대한 합당한 대응”이라고 강조했다.
이 법에 따라 새해부터 러시아 아동의 미국 입양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됐다. 미국과 러시아가 2010년 체결해 2012년 11월 발효한 입양 관련 협정도 폐기됐다. 실제로 최근 미국행이 결정됐던 러시아 고아 46명이 출국하지 못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러시아 아동을 입양한 국가였다. 미국은 연간 러시아 아동 1000~3000명을 입양했으며, 지난 20년간 6만 명을 입양했다. 2011년 러시아 전체 입양아 수는 1만800명으로, 이 가운데 3400명이 외국으로 갔다. 미국 956명, 이탈리아 798명, 스페인 685명, 프랑스 283명, 독일 215명, 아일랜드 129명, 이스라엘 87명 등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외국으로 입양된 러시아 아동은 4만5000여 명이나 된다. 현재 러시아에는 고아가 74만 명이고, 그중 아동보호시설에 수용된 인원은 8만3000여 명, 국내에 입양되는 숫자는 연간 7000명뿐이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는 국내 입양을 더욱 활성화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푸틴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내 입양 절차를 간소화하고 입양 부모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고아 보호 조치 관련 대통령령에 서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러시아 인권운동가들은 죄 없는 아이들을 정치문제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면서 이 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국 백악관도 성명을 내고 “모든 어린이에게는 가족에게 사랑받으면서 자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면서 “이들의 운명을 정치문제와 연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패트릭 벤트렐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러시아가 양국 간 입양을 중단하고 미국인과 협력하는 러시아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양국 관계 악화 ‘신냉전’ 돌입할 수도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인권전쟁을 계기로 크게 악화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선 양국이 ‘신(新)냉전’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크렘린궁 귀환’ 이후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갈수록 냉랭해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 5월 취임 직후 미국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 불참하고 6월 초 중국을 방문해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참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으며,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 주도의 이란 제재에 반대 의견을 밝히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은 시리아 사태를 놓고도 티격태격해왔다. 미국은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와의 군사 협력관계를 완전히 끊고 모든 무기 지원과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에 대한 외세의 무력 개입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시리아 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럽에 구축하려는 미사일방어체제(MD)에도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알렉세이 푸시코프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장은 “양국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면서 “이해관계가 너무 다르다. 장기적인 불신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마샤 리프만 카네기 모스크바센터 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 힘을 약화시키고 이익을 침해한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양국 관계 악화로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온 ‘리셋(Reset·재설정)’ 정책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던 시대는 오래전 끝났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인권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만큼 오바마 집권 2기와 푸틴 집권 3기 양국 관계가 다시 적대적으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리셋에 대해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면서 “미국이 인권을 핑계로 러시아를 압박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을 비롯해 시리아, 이란 등 각종 국제 현안에서 양국 간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는 이유는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 과정에서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략 때문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를 옛 소련과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야심을 지닌 만큼 미국과는 앞으로도 대립각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을 견제하려고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을 적극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2012년 말 연례 기자회견에서 “지금 러시아와 중국 간 신뢰 관계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라면서 “양국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새해에는 미국 대 중국·러시아 대결 구도가 본격화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