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컨빅션’은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가족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면 가족 중 누군가 뒤늦게 법학공부를 시작해 변호사가 될 수 있을까.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해 합격까지 빨라야 3~4년이고, 대부분 10년 이상 투자하고도 성공을 기약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사정이라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물론 로스쿨 제도가 있긴 하지만, 뒤늦게 법 공부를 시작한다는 조건과 값비싼 학비까지 고려한다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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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베티 앤 워터스(힐러리 앤 스왱크 분)라는 여성이 뒤늦게 변호사에 도전해 오빠의 누명을 벗기기까지 십수 년간 벌이는 힘겨운 싸움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에 법과 공권력의 모순 및 횡포가 또 다른 이야기 축을 이룬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법이 강자에게는 든든한 보호막이지만 약자에게는 무서운 칼인 현실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영화는 실제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1980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케네스 워터스(샘 록웰 분)라는 남자가 체포된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주변에 범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서에 불려가던 남자다. 현장에서 발견한 가해자의 혈흔과 케니(케네스의 애칭)의 혈액형이 같다는 점이 결정적 증거가 돼 결국 케니는 용의자가 되고, 살인 혐의가 확정돼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나 케니는 여전히 수감 중이고, 여동생 앤은 대학 강당에서 법학 수업을 받고 있다. 교수가 앤에게 질문한다. “계약이란 무엇인가?” 앤이 답한다. “법적 효력을 지닌 약속입니다.” 이쯤 되면 어떤 관객은 자연스럽게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의 ‘사회계약론’을 연상할 것이다. 국가나 정부, 법 같은 제도는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개인 상호 간 맺은 약속의 산물이라는 이론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수감 중인 남자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는 여자의 과거, 현재를 오가며 법과 공권력이 어떻게 ‘정의’을 배반하고, 힘없는 개인을 부당하게 억압하면서 불평등하게 적용되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케니와 앤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끔찍하게 위하는 남매였다. 남성편력이 심한 어머니 탓에 친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돌며 불우하게 살아온 남매는 성장해 각자 가정을 이루면서 평범한 삶에 정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케니가 1급 살인죄를 선고받자 남매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케니, 그런 오빠를 지켜보는 앤은 무죄를 주장하면서 항소를 결심하지만, 거액의 변호사 비용이라는 높은 벽에 부닥친다.
앤은 결국 자신이 직접 변호사가 돼 오빠의 누명을 벗기고 오빠를 감옥에서 꺼내기로 결심한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에 로스쿨에 들어가 낮에는 공부에 매진하고 밤에는 ‘식당 알바’에 나선다. 그러나 오직 오빠만을 위해 육법전서와 씨름하는 앤을 지켜보는 남편은 점점 지쳐간다. 앤의 두 아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앤과 남편은 이혼한다. 시련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앤은 끝까지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약 없는 감옥살이에 절망한 케니가 자살 소동을 벌이고 앤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 고난이 계속되지만, 마침내 앤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손에 쥔다. 하지만 앤이 변호사가 된 것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검찰 측은 케니의 전처 등 새로운 증인을 내세우며 피고인의 형을 확정하려 든다. 증인석에 앉은 케니 지인들은 하나같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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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10여 년 후 실낱같은 희망조차 남지 않았다고 포기할 무렵, 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비친다. 1992년 형사사건에 DNA 감식기법을 처음 사용해 판결을 바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앤은 사건 당시 가해자 혈액과 오빠의 혈액에 대한 DNA 감식에 마지막 희망을 건다. 하지만 웬걸, 사건이 발생한 지 10여 년이 넘었다는 이유로 경찰이 사건 당시 증거물을 모두 폐기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접한다.
앤이 오빠를 구제하려고 사건의 진실을 캐는 과정에서 검찰은 명백한 오심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재판을 질질 끈다. 그뿐 아니라 케니의 유죄를 확정하려고 증인을 협박하고 위증을 강요했으며, 증거를 일부 조작한 사실까지 드러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지금은 ‘과학수사’의 상징격인 DNA 감식 결과를 겨우 20여 년 전 처음으로 법적 증거로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당시 ‘혈액형이 같다’는 것이 유력한 증거로 채택된 것 또한 지금으로선 믿기지 않는다.
‘컨빅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여인의 숭고한 집념과 위대한 의지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사법권력과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태다.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우리 관객에게는 위안일까 절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