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소학 강의에서 공부에 열중하는 어린이들.
당 고종 때 등왕각을 개·보수하는 일을 맡은 지방관 염백서는 자신의 사위를 출세시키려고 ‘등왕각서(騰王閣序)’라는 글을 미리 써놓게 한 뒤 관리와 명사들을 초청한 등왕각 낙성식에서 마치 즉석에서 문장을 지은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 그런데 행사 당일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한 문사가 한잔 술을 들이켜고 일필휘지로 글을 지으면서 염백서의 계획은 허사가 됐다.
그 문사가 당나라 때 천재시인으로 유명한 왕발(王勃·650~676)이다. “등왕각 낙성식에 가서 서문을 지으라”는 예언성 첩보(?)를 들은 왕발은 조그마한 배를 빌려 타고 길을 나섰는데, 때마침 순풍이 불어 하루 만에 700리 뱃길을 달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왕발은 어부지리로 얻은 기회를 활용해 이름과 명성을 천하에 날릴 수 있었다. 왕발과 달리 억세게 재수 없는 경우도 있다. 송나라 때 한 재상이 가난한 선비에게 장시성 천복산에 있는 천하명필 구양순의 비문을 탁본해 가져오면 사례를 하겠다고 했다. 때마침 돈이 궁하던 선비는 희망에 부풀어 한달음에 천복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날 밤 벼락이 비석에 내리치는 바람에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명심보감’ 순명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때가 오니 바람이 불어 왕발을 등왕각으로 날려보냈고, 운이 물러가니 벼락이 천복산 비석을 깨뜨렸구나(時來風送 王閣 運退雷轟 薦福碑).”
그러니까 운(때)이 오면 하늘이 알아서 도와주고 시절 인연도 좋게 엮여 발복(發福)으로 나타나고, 때가 아니면 발버둥쳐봐야 만사 헛일이 되고 만다는 논리다. ‘명심보감’은 이 구절에 바로 이어 ‘열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리석고 말 못하는 벙어리라도 호화롭게 사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지혜롭고 총명할지라도 빈곤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태어난) 연월일시에 모든 것이 다 실려 있으니, 따져보면 이는 타고난 명(命)에 달린 것이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태어난 생년월일로 사주팔자를 따져 사람의 운명을 감정한다는 명리학 혹은 운명학에서 주장하는 관점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이 명에 달렸다고 하니, 여기에 인간의 노력 혹은 의지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명심보감’은 순명편 첫머리에 조선 왕이나 사대부도 꼼짝 못 할 권위의 상징인 ‘공자’의 말씀까지 빌려와 대항의 변을 봉쇄해버렸다. “사생(死生)은 유명(有命)이요, 부귀는 재천(在天)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유함과 귀함 역시 하늘에 달렸다는 이 문구를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공자는 젊은 시절 큰 뜻을 품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치려 했으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바람에 헛고생만 하고 노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춘추 시기에 험한 세상을 살아본 공자 역시 부귀빈천이 인위적으로 어찌해 볼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했던 것일까, 아니면 큰 재주를 가지고도 뜻을 펼치지 못하는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런 회피성 발언을 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일생 동안 늘 궁핍하거나 늘 호화롭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공자 역시 생전에는 누리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만고에 없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는가. 시간 주기성에 의해 호운(好運)이 있으면 악운(惡運)이 짝으로 존재한다는 게 세상 이치요, 성현 말씀이다. 다만 주어진 일을 하면서 호운이 찾아왔을 경우 그것을 누리고 감당해낼 수 있는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꼭 명심해둘 일이다. 반대로, 악운이 오더라도 건강을 유지하면 언젠가 그것을 떨쳐버리고 일어설 수 있다는 뜻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