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낙은<br>● 1957년 부산 출생<br> ● 한양대 의대 임상병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임상병리학)·박사(해부학)<br> ● 국과수 근무(1995년~)<br> ● 대한법의학회 부회장(2011년~)<br> ● 아시아태평양법의학회 회장(2012년~)
뒤이어 그는 자신이 주도하는 ‘대량재해 희생자관리의 다국적 공조 시스템’ 개발 과정을 설명했다. 이는 대량재해가 발생했을 때 시신의 지문, 치아, 유전자 등을 종합해 신원을 확인하는 시스템으로, 현재 프로그래머 10여 명이 연구해 2013년 완성할 예정이다.
정 법의관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뿐이 아니다. 그는 국과수 비상설 조직인 한국신원확인단(Korea DVI) 단장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 김해 항공기 추락 사고(2002), 대구지하철 참사(2003), 동남아 쓰나미(2004),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 사고(2007), 이천 냉동창고 화재(2008), 제주 4·3사건 희생자 유골 발굴사업 등 대형 재난현장에서 망자의 신원 확인을 주도했다. Korea DVI는 국과수가 재해 발생 시 국과수 내외부 인력을 지원받아 꾸리는 조직으로, 대부분 현재 일어난 재난 사건에 투입되지만 협력관계에 있는 민간 전문가가 협조를 요청하는 경우 이례적으로 과거 사건도 맡는다.
정치적 격변기 보내며 인권 생각
그가 이 조직을 이끄는 이유는 뭘까. “개인이 부각되면 조직에 누를 끼칠 수 있다”면서 말을 아끼던 그는 “떠나버린 생명(시체)도 살아 있는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에둘러 말했다. 정 법의관은 2시간 동안 Korea DVI 역사를 설명한 뒤에야 속내를 털어놨다. 그 사이 그는 기자에게 커피, 녹차, 보이차를 세 잔이나 건넸다.
“한양대 의대 임상병리학과 75학번으로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어요. 입학하자마자 휴교령이 떨어졌고, 본과 3학년 때(1979) 10·26사건, 본과 4학년 때(1980)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죠. 당시 의대학생회장으로서 죽어가는 선후배들을 보고 인권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그때 경험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도 모르죠. 좌우 이념을 떠나 기본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대학 졸업 후 포항성모병원 임상병리학과 과장으로 근무하며 경험을 쌓은 그는 1995년 국과수에 들어온다. 대학에서 ‘의사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국과수에서 다량 데이터를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성경의 마태복음 구절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국과수로 적을 옮긴 지 두 달 만에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 투입됐다.
“아이 시신은 어른 시신과 섞이거나 건물자재 압력 때문에 소실되는 경우가 많아요. 당시 장난감을 사러 갔던 6세 꼬마도 다른 시신들에 신체 일부가 섞여 국과수에 들어왔죠. 먼저 발목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심하게 부패한 시신 조각으로 돌아온 자식을 안고 그 엄마가 얼마나 울던지…. 그 모습을 보고 대형 재해를 당한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시신 수습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국가 전체의 재난관리시스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거든요.”
이후 그는 을지의과대학에서 2년 8개월 동안 임상병리학과 교수를 지내다 국과수로 돌아왔다. 대학 때 자신을 도와준 은사 부탁으로 신생 대학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에게 외유한 이유를 묻자 “세상살이는 의리로 가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Korea DVI는 2002년 김해 항공기 추락 사고를 거치며 그 틀을 마련한다. 월드컵 개막 전에 시신 식별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을 받자 국과수 내외부 인력을 동원해 운영 구조를 만든 것이다. Korea DVI는 국과수, 대학, 수사기관, 유전자 감식단 등 10여 개 분야 전문가가 모인 오케스트라. 정 법의관은 단장으로서 전문가들의 역량을 조율했고, 이를 계기로 시신 유전자 검사기법이 발달했다. 이후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영상분석기술이 발전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쓰나미 참사 당시 파견된 19개국 중 가장 빠르게 자국민 시신을 수습했다.
그동안 그는 시신 수습, 발굴 같은 ‘과학’보다 유가족 지원이라는 ‘관계’에서 어려움이 더 컸다고 토로했다. 수사기관이 떠난 이후에도 맨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켜야 하는 국가공무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컸던 탓으로 보인다. 그는 “국과수는 그 존재감만으로 유가족에게 ‘당신네 슬픔을 잊지 않는 국가기관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유가족은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국과수가 2003년 2월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시신을 마지막으로 인계한 것은 그해 8월. 6개월간 국과수는 유가족과 마주해야 했다.
‘유가족 지원’ 가장 어려워
정낙은 수석법의관이 파워포인트를 비롯한 3차원 영상을 활용해 Korea DVI를 설명했다.
Korea DVI 단원에게 ‘인화’와 ‘협동’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0여 개 분야 전문가가 비상시적으로 모이다 보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4명 1조의 경우 한 사람이 꾀를 부리면 다음 날 그 사람을 교체해서라도 분위기를 쇄신한다. 그는 “능력이 200점인 사람들이 50% 협동하는 것보다 능력이 50점인 사람들이 100% 협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이 일은 과학이 아닌 정으로 하는 거예요. 돌아가신 분과 유가족에 대한 연민의 마음 없이는 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몇 달 동안 죽어라 고생하고, 아무런 빛을 보지 못해도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돌아올 사람만 Korea DVI에 지원하라’고 말해요.”
정 법의관은 “Korea DVI를 상시조직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평소 인력이 모자란 국과수에서 대형 재해가 발생해 내부 인력이 Korea DVI로 빠져나가면 과부화가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직을 상설화하면 시신 수습 대응력을 좀 더 체계적으로 갖출 수 있다.
“국과수는 인권 유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현장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북한이 통일하면 북한에서 자행된 학살 사건을 파헤치는 것도 우리 임무겠죠. 내년에는 중동국가 법의관을 초청해 테러 발생에 대비하는 교류의 장을 마련할 거예요. 극단적 결과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최대한 빨리 시신을 찾아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 우리 임무니까요. 국가가(우리가) 국민 한 사람의 죽음도 간과하지 않아야 국민이 국가를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