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감성의 달이다. 출퇴근길에 건너는 한강엔 갈색 감성이 흐른다. 노래가 한 시절을 추억케 한다. 세밑을 앞둔 중년 남성들은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운전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에 가슴이 부르르 떨리기도 한다. 그때 그 사람 그 추억이 파문처럼 번져온다. ‘가객(歌客)’ 조용필은 대한민국 4050세대의 영원한 추억의 아이콘이다. 그는 감성 편집자다.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 갈 인생길/ 우린 무슨 사랑 어떤 사랑했나/ 텅 빈 가슴속에 가득 채울 것을 찾아서/ 우린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네….”(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 중에서)
1980년대를 ‘청춘의 강’으로 건넜던 사람은 안다. 조용필의 노래는 하나의 문학이었다. 일회용으로 소비하는 유행가가 아닌, 힘겹게 굴리는 생(生)의 수레바퀴 소리였다. 1950~60년대 태어난 한국의 전후세대는 대부분 ‘조용필 가요문학’의 향유자가 된다. 그의 정련된 노래 가사와 리듬 하나하나에 포섭된다. 유행처럼 휩쓸었던 FM 팝송의 파도에도 ‘조용필 가요문학’의 정서적 울림은 굳건했다. 당시 기성세대는 혼을 내뿜던 ‘창밖의 여자’에게 위로받고 술 한잔을 기울였다. ‘단발머리’ ‘고추잠자리’는 10, 20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작은 거인’ 조용필의 도전적 음악성은 충격 자체였다. 기존 한국 가요의 지형을 뒤흔든 혁명성의 요람이었고, 최초로 오빠부대가 태어났다. 바야흐로 제대로 구색을 갖춘 한국의 첫 ‘대중문화’가 태동한 것이다. 조용필 팬클럽은 한국의 스타 팬클럽 원조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우리의 추억을 태워버렸다….”(노래 ‘Q’ 중에서)
“꿈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저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느껴서 열심히 하다 보니 노래인생 43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지켜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콘서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 경동고 졸업 이듬해인 1969년 미8군 무대에서 록그룹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 이후 한국의 가요역사를 개척하고 관장해왔다.
그가 불렀던 180여 개 노래는 고달픈 현대사 속 휘청거렸던 우리의 삶을 대변한 서정시다. ‘영원한 오빠’가 시대의 고비와 힘겨운 심정을 어루만져주었기에 4050세대의 가슴속 낭만은 언제나 현역처럼 출렁거린다. 아날로그 세대이면서 디지털 변화의 파도까지 헤쳐 나가야 하는 세대.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의 격랑을 온몸으로 치러낸 한국 중년의 마음을 누가 위무할 수 있을까. 조용필뿐이다.
그는 오직 콘서트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조용필 콘서트는 그 옛날 청춘의 꿈을 부활시키고,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랑데부 공간이다. 듣고 싶은 것은 위대한 가객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한 시절을 살아냈지만 아직 못 다한 아쉬움, 회한의 추억, 붙잡고만 싶은 그리움 조각을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지키고 싶은 오늘의 낭만, 내일의 꿈을 조용필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외로워 마세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물밀 듯 다가오는 지난 추억이 지금도 아름다워요/ 이 밤이 새고 나면 가야 하지만 그것을 이별이라 하지 말아요/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우리 마음 함께 있으니/ 그대 그대 정말 외로워 마세요….”(노래 ‘외로워 마세요’ 중에서)
조용필은 굽이치는 한국인의 정서를 유장한 가사와 살가운 리듬으로 담아냈다. 그는 먼저 노래의 장인(master)이었다. 노래의 거장은 인간을 위로할 정서의 선(線)을 제대로 뽑아낼 줄 알았다. 자신이 펼칠 무대의 종합 구성을 꿴다.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총지휘자, 총연출자로서 콘서트의 레이아웃까지 해낸다.
4050세대는 조용필과 함께 간다. 가객의 감성 편집 능력은 언제나 한국 중년층을 행복하게 한다. 빛바랜 추억의 노트에 켜켜이 갈무리된 청춘을 부활시킨다. 그리움을 살려내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가객이 늘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해마다 조용필을 건너야 겨울로 진입할 수 있다.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 갈 인생길/ 우린 무슨 사랑 어떤 사랑했나/ 텅 빈 가슴속에 가득 채울 것을 찾아서/ 우린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네….”(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 중에서)
1980년대를 ‘청춘의 강’으로 건넜던 사람은 안다. 조용필의 노래는 하나의 문학이었다. 일회용으로 소비하는 유행가가 아닌, 힘겹게 굴리는 생(生)의 수레바퀴 소리였다. 1950~60년대 태어난 한국의 전후세대는 대부분 ‘조용필 가요문학’의 향유자가 된다. 그의 정련된 노래 가사와 리듬 하나하나에 포섭된다. 유행처럼 휩쓸었던 FM 팝송의 파도에도 ‘조용필 가요문학’의 정서적 울림은 굳건했다. 당시 기성세대는 혼을 내뿜던 ‘창밖의 여자’에게 위로받고 술 한잔을 기울였다. ‘단발머리’ ‘고추잠자리’는 10, 20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작은 거인’ 조용필의 도전적 음악성은 충격 자체였다. 기존 한국 가요의 지형을 뒤흔든 혁명성의 요람이었고, 최초로 오빠부대가 태어났다. 바야흐로 제대로 구색을 갖춘 한국의 첫 ‘대중문화’가 태동한 것이다. 조용필 팬클럽은 한국의 스타 팬클럽 원조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우리의 추억을 태워버렸다….”(노래 ‘Q’ 중에서)
“꿈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저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느껴서 열심히 하다 보니 노래인생 43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지켜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콘서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 경동고 졸업 이듬해인 1969년 미8군 무대에서 록그룹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 이후 한국의 가요역사를 개척하고 관장해왔다.
그가 불렀던 180여 개 노래는 고달픈 현대사 속 휘청거렸던 우리의 삶을 대변한 서정시다. ‘영원한 오빠’가 시대의 고비와 힘겨운 심정을 어루만져주었기에 4050세대의 가슴속 낭만은 언제나 현역처럼 출렁거린다. 아날로그 세대이면서 디지털 변화의 파도까지 헤쳐 나가야 하는 세대.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의 격랑을 온몸으로 치러낸 한국 중년의 마음을 누가 위무할 수 있을까. 조용필뿐이다.
그는 오직 콘서트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조용필 콘서트는 그 옛날 청춘의 꿈을 부활시키고,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랑데부 공간이다. 듣고 싶은 것은 위대한 가객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한 시절을 살아냈지만 아직 못 다한 아쉬움, 회한의 추억, 붙잡고만 싶은 그리움 조각을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지키고 싶은 오늘의 낭만, 내일의 꿈을 조용필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외로워 마세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물밀 듯 다가오는 지난 추억이 지금도 아름다워요/ 이 밤이 새고 나면 가야 하지만 그것을 이별이라 하지 말아요/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우리 마음 함께 있으니/ 그대 그대 정말 외로워 마세요….”(노래 ‘외로워 마세요’ 중에서)
조용필은 굽이치는 한국인의 정서를 유장한 가사와 살가운 리듬으로 담아냈다. 그는 먼저 노래의 장인(master)이었다. 노래의 거장은 인간을 위로할 정서의 선(線)을 제대로 뽑아낼 줄 알았다. 자신이 펼칠 무대의 종합 구성을 꿴다.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총지휘자, 총연출자로서 콘서트의 레이아웃까지 해낸다.
4050세대는 조용필과 함께 간다. 가객의 감성 편집 능력은 언제나 한국 중년층을 행복하게 한다. 빛바랜 추억의 노트에 켜켜이 갈무리된 청춘을 부활시킨다. 그리움을 살려내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가객이 늘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해마다 조용필을 건너야 겨울로 진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