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솜사탕 기계에서 설탕 실이 풀어져 나무 막대에 모이듯
손주, 증손주들이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 모인다.
‘달리아’와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성한 계절.
‘토실’, ‘토돌’이란 이름의 붉은 눈 흰토끼들이 함께한 가족 캠프에
가겟집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은 소복한 외할머니 흰 머리카락.
손주, 증손주들 다 떠난 여름밤의 툇마루엔
음력 칠월 보름달 혼자 월식을 하고
솜사탕은 너무 금방 녹는다.
―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민음사, 2011)에서
달콤한 외할머니네
유년 시절, 방학이 다가오면 친구들과 나는 매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어른들 없이 우리끼리만 물놀이에 가자는 둥 자전거를 타면 2시간도 채 안 걸릴 거 같으니 눈썰매장에 가자는 둥 놀이동산에 가서 온종일 초고속 롤러코스터만 타자는 둥 입만 열면 하고 싶은 일이 줄줄 새어 나오던 시절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요란스러운 설레발이 동원됐는데, 이 때문에 우리의 기대는 터질 듯 말 듯 부풀어만 갔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계획 대부분은 우주인이 되겠다는 나의 장래희망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많이 어렸고,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었다. 운전도 못했고 돈도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라곤 고작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 중 어떤 것을 볼 것인가 결정하는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이삼 주 정도 지내고 나면 또다시 몹시 지루해졌다. 그리고 남은 방학 기간 외가에 가 있을지, 친가에 가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친구들과 나는 사이좋게 외가를 선택했다. 우리는 서로 친가보다는 외가와의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수줍게 고백했다.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아이가 외가와 외할머니를 더 살갑게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퇴근 후 집에 가서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뻗고 귤을 까먹으며 TV를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니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냥 좋은 것, 마냥 편한 곳이었다. 생각해보라. ‘외갓집’이란 말은 있어도 ‘친갓집’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당시 외할머니는 이웃 도시에서 슈퍼를 운영했는데, 여러 이유에서 나는 그곳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홉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군것질을 맘껏 할 수 있는 곳은 천국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느릿느릿 빨아 먹으며 브라운관을 통해 ‘달리아’와 ‘백일홍’을 보노라면,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정성스레 해준 저녁밥을 먹으면 또다시 거짓말처럼 내 세상이 찾아왔다. 그곳에 ‘붉은 눈 흰토끼’는 없어도, 그 대신 ‘맨드라미’처럼 ‘붉은 눈’이 될 때까지 TV를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TV를 보다 모로 누워 잠이 들면, 슬그머니 오셔서 이불을 폭 덮어주고 가던 외할머니. 그리고 그 애잔하게 굽은 등.
즐거웠던 며칠이 지나고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처럼 외갓집 ‘솜사탕은 너무 금방 녹는’ 것이었다. 달콤한 나머지, 흡사 가짜 같은, 꿈결 같은 솜사탕. 외할머니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손등으로 연방 훔쳐냈다. 그럴 때 나는 자연스럽게 손자가 아닌 ‘손주’가 됐다. 꼭 그래야 했다. 그게 외할머니만의 다정한 호명 방식이므로. 다음 방학 때까지 할머니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채로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탄 자동차는 저 멀리 한 점 불빛으로 사라지고, 열심히 손을 흔들던 외할머니는 육안으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어렵게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빤하지만, 빤해서 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더 아픈 풍경이 있다. 그러니까 외가를 떠날 때처럼, 우리의 달콤한 꿈들이 ‘솜사탕’처럼 몰래 녹아버릴 때.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솜사탕 기계에서 설탕 실이 풀어져 나무 막대에 모이듯
손주, 증손주들이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 모인다.
‘달리아’와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성한 계절.
‘토실’, ‘토돌’이란 이름의 붉은 눈 흰토끼들이 함께한 가족 캠프에
가겟집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은 소복한 외할머니 흰 머리카락.
손주, 증손주들 다 떠난 여름밤의 툇마루엔
음력 칠월 보름달 혼자 월식을 하고
솜사탕은 너무 금방 녹는다.
―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민음사, 2011)에서
달콤한 외할머니네
유년 시절, 방학이 다가오면 친구들과 나는 매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어른들 없이 우리끼리만 물놀이에 가자는 둥 자전거를 타면 2시간도 채 안 걸릴 거 같으니 눈썰매장에 가자는 둥 놀이동산에 가서 온종일 초고속 롤러코스터만 타자는 둥 입만 열면 하고 싶은 일이 줄줄 새어 나오던 시절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요란스러운 설레발이 동원됐는데, 이 때문에 우리의 기대는 터질 듯 말 듯 부풀어만 갔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계획 대부분은 우주인이 되겠다는 나의 장래희망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많이 어렸고,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었다. 운전도 못했고 돈도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라곤 고작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 중 어떤 것을 볼 것인가 결정하는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이삼 주 정도 지내고 나면 또다시 몹시 지루해졌다. 그리고 남은 방학 기간 외가에 가 있을지, 친가에 가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친구들과 나는 사이좋게 외가를 선택했다. 우리는 서로 친가보다는 외가와의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수줍게 고백했다.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아이가 외가와 외할머니를 더 살갑게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퇴근 후 집에 가서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뻗고 귤을 까먹으며 TV를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니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냥 좋은 것, 마냥 편한 곳이었다. 생각해보라. ‘외갓집’이란 말은 있어도 ‘친갓집’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당시 외할머니는 이웃 도시에서 슈퍼를 운영했는데, 여러 이유에서 나는 그곳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홉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군것질을 맘껏 할 수 있는 곳은 천국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느릿느릿 빨아 먹으며 브라운관을 통해 ‘달리아’와 ‘백일홍’을 보노라면,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정성스레 해준 저녁밥을 먹으면 또다시 거짓말처럼 내 세상이 찾아왔다. 그곳에 ‘붉은 눈 흰토끼’는 없어도, 그 대신 ‘맨드라미’처럼 ‘붉은 눈’이 될 때까지 TV를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TV를 보다 모로 누워 잠이 들면, 슬그머니 오셔서 이불을 폭 덮어주고 가던 외할머니. 그리고 그 애잔하게 굽은 등.
즐거웠던 며칠이 지나고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처럼 외갓집 ‘솜사탕은 너무 금방 녹는’ 것이었다. 달콤한 나머지, 흡사 가짜 같은, 꿈결 같은 솜사탕. 외할머니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손등으로 연방 훔쳐냈다. 그럴 때 나는 자연스럽게 손자가 아닌 ‘손주’가 됐다. 꼭 그래야 했다. 그게 외할머니만의 다정한 호명 방식이므로. 다음 방학 때까지 할머니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채로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탄 자동차는 저 멀리 한 점 불빛으로 사라지고, 열심히 손을 흔들던 외할머니는 육안으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어렵게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빤하지만, 빤해서 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더 아픈 풍경이 있다. 그러니까 외가를 떠날 때처럼, 우리의 달콤한 꿈들이 ‘솜사탕’처럼 몰래 녹아버릴 때.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