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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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추억’에 대하여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1-04-08 1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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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1일 대낮 서울 강남의 한 호프집에서 칼부림이 일어났습니다. 30cm 칼에 10여 곳을 찔린 피해자 B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죠. 멍하니 서 있던 가해자 A는 경찰의 타이름에 정신을 차린 듯 칼을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저자한테 괴롭힘을 당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경기 이천시의 한 시골학교를 나왔죠. 하지만 두 사람은 동창 사이라기보다 주종관계에 가까웠습니다. 덩치가 큰 피해자는 학교 일진이었고, 왜소한 가해자는 주로 당하는 쪽이었죠. 졸업 후 왕래가 없던 두 사람은 지난해 가을 사업 때문에 재회했습니다. 비극의 발단이었죠.

    두 사람의 관계는 30년 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빵 사오라는 심부름이 사업자금을 조달하라는 닦달로 바뀌었고, B의 괴롭힘은 더 집요하고 잔인해졌습니다. 한겨울 속옷만 입힌 채 무릎을 꿇렸고, A의 부인을 찾아가 협박했으며, 아들에게 “아버지는 병신인데 아들은 멀쩡하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경찰에 따르면 A는 두 차례 자살기도 끝에 결국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물론 모두 A의 진술입니다).

    ‘굴욕의 추억’에 대하여
    “학창 시절이면 모르겠지만 40대가 돼서도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족을 볼모로 협박했다잖아. 신고해도 언젠가 출소할 텐데,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극단적 결심을 했겠지.” 한 사석에서 이 사건이 화제에 올랐는데, 이런저런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남성들은 “학창 시절 관계는 성인이 돼서도 유효하다”며 A의 처지를 헤아리더군요. 그리고 모두 ‘굴욕의 추억’에 잠겨 ‘미운 얼굴’을 곱씹었습니다.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잊을 수 없나 봅니다. 신변을 위해 풀 한 포기도 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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