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 바로 뒤로 골프장 공사가 한창이다. 공터에도 민가가 곧 들어설 예정이다.
3월 15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만난 임병선(74) 씨는 롯데그룹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임씨 집에서 10m 떨어진 곳에는 2m가 넘는 철제 펜스가 둘러쳐져 있고 그 너머로 14번 홀을 뜻하는 ‘14H’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임씨의 집은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부여리조트가 지난해 10월 28일부터 공사를 시작한 롯데스카이힐 부여CC(18홀) 아래에 있다.
그가 이토록 화가 난 이유는 현재 사는 집이 공사 시작 두 달 전인 지난해 8월 정든 고향 땅에서 밀려나와 이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50년 동안 규암면 합정리에 살았는데 백제문화단지에 편입됐다. 문화단지가 부여를 살린다고 해 눈물을 머금고 집을 신리로 옮겼는데 이번에는 골프장 바로 아래 살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백제문화단지 근처 주민들 분통
백제문화단지 인근 4개 마을 주민은 부여롯데골프장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응에 나섰다. 주민들이 가장 불만이 많은 부분은 골프장 추진 과정에서 보인 롯데의 일방적 태도다. 롯데와 부여군은 “중앙지, 지방지 등 2개 신문에 주민설명회 공고를 한 뒤 2009년 8월 4일 주민설명회를 열어 주민의 동의를 얻었기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 “민가와 너무 가깝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골프장 외곽 경계와는 10m 떨어지지만 조경 사업을 하면 필드와 40m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용만 신리 이장은 “롯데가 근거를 남기려고 골프장과 아무 관계도 없는 부여읍내 주민 40여 명만 모아 형식적으로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정작 골프장 아래 살게 된 우리는 골프장이 어디에 들어오는지도 몰랐다”고 분노했다.
이에 롯데 측은 3월 3일 골프장과 관련한 사업설명회를 다시 열었다. 하지만 송진구(45) 대책위원장은 “골프장이 들어오면 지하수가 고갈되고 골프장 농약이 흘러 내려와 마을 수익원인 친환경 농업 브랜드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롯데부여리조트 관계자는 “충남도와 부여군이 먼저 요청을 해 우리가 온 것인데 이제 와 일부 주민이 반대한다고 사업을 포기할 순 없다. 코스를 능선 안에 배치하고 오수가 골프장 밖으로 나가지 않게 설계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써 환경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롯데에 유리한 게 사실이다. 골프장 허가 관청인 충남도와 부여군 모두 롯데의 부여CC를 지역발전에 꼭 필요한 옥동자 같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충남도는 원래 백제문화단지를 풍속 종교촌, 예술인마을 등으로 채울 생각이었으나 예산 마련이 어렵게 되자 2008년 12월 23일 롯데로부터 약 3000억 원을 투자받기로 하고 민간투자사업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충남도는 롯데에 백제문화단지에 있던 합정리 땅을 골프장 부지로 제공했다. 지역 주민들은 “우리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도 문제지만 백제문화단지가 롯데부여리조트의 부속물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입을 모은다.
롯데가 골프장 건설을 두고 주민과 마찰을 빚는 곳은 부여뿐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골프장 건설을 추진해온 인천 계양구 계양산, 부산 북구 백양산 일대 주민도 골프장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롯데 측은 “골프장 건설과 관련해선 주민, 환경단체와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골프장 입주 지역 주민들은 “롯데가 골프장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자리만 골라서 선택하는 것 같다”고 반박한다.
롯데가 이미지 추락을 감수하고도 골프장을 짓는 이유는 리조트 산업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호텔업계는 비즈니스형 호텔이 아닌 가족 지향 리조트 사업 개척에 힘쓴다. 아버지는 골프를 치고 어머니는 스파와 쇼핑을 하고 아이들은 놀이공원에서 뛰어노는 콘셉트다. 롯데부여리조트에도 골프장을 비롯해 테마파크, 스파빌리지, 아웃렛 등이 들어설 예정. 롯데호텔 관계자는 “경쟁사의 유명 리조트를 잡기 위해 승부수를 띄우려면 골프장은 필수”라고 말했다. 롯데그룹은 롯데스카이힐CC란 골프장 법인을 운영 중인데 이미 제주, 경남 김해, 경북 성주 3곳의 스카이힐CC를 소유했다.
그런데 계양산 일대와 백양산 일대의 경우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롯데그룹이 골프장을 비롯한 위락시설을 짓기 위해 아주 오래전에 땅을 구입해놓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땅을 최초로 구입한 사람은 그룹 오너인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그룹 오너가 골프장을 지으려 구입한 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놀린다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계양산 일대는 신 회장이 1974년에 직접 땅을 매입했다가 롯데그룹의 계열사인 롯데상사에 매각한 경우다. 이후 롯데는 1990년대부터 이 일대에 골프장 건설을 타진해오다 2000년 18홀 규모 골프장, 호텔, 공원, 놀이시설이 포함된 대형 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며 계획을 본격화했다. 이곳은 도심에 자리한 산이라 인천 시내에서 접근하기 좋고 서울, 인천공항 등과도 멀지 않아 최적의 입지로 꼽혔다.
시민의 허파 잘라내고 없애고
문제는 롯데의 계산과 시민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지역 시민단체들은 계양산이 인천의 허파 기능을 해왔는데 이곳에 골프장을 짓는다는 것은 환경권을 앗아가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 시절 급물살을 탔던 골프장 건설은 골프장 건설 반대 공약을 내건 송영길 시장이 지난해 7월 취임한 뒤 상황이 급반전됐다. 올 1월 인천시는 롯데의 골프장 건설을 막기 위해 체육시설 폐지를 위한 행정절차에 착수했다. 계양산 골프장 저지 인천시민위원회 노현기 사무처장은 “단순히 시장이 바뀌었다고 결정이 바뀐 것이 아니다. 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기에 하루아침에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단, 발전소 등 이산화탄소 발생 요인이 많은 인천에 더 필요한 것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녹지다”라고 말했다.
롯데 측은 내부적으로 포기 의사를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장 허가 조건으로 인천시가 요구한 것을 다 들어줬는데도 인천시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송영길 시장 당선 이후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섭섭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양산 일대는 롯데가 1980년대 후반부터 땅을 매입하는 등 준비를 시작해 1999년에 이르러서야 골프장 건설 신청을 낸 경우다. 당시 인근에 이미 롯데호텔이 있고 제2롯데월드도 건설될 예정이라 골프장까지 들어서면 롯데로서는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백양산 골프장은 인근 아파트 단지 주민의 반대가 특히 심하다. 이들은 “백양산 건설 과정에서 구청이 롯데를 대신해 나무를 베어주었다” “롯데가 주민들과 따로 접촉해 이간질시키고 있다”는 등 각종 의혹을 제기한다. 백양산 롯데골프장 저지위원회 관계자는 “롯데는 값이 쌀 때 사둔 땅을 내부거래를 통해 이익을 남기고도 골프장으로 수익을 내는 땅장사 그룹”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때문일까. 이 지역에서 롯데는 주민의 반대가 심하면 여론 추이를 지켜보다 조용해지면 다시 밀어붙이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두 곳 모두 오래 끌어온 곳이다. 시민단체와 환경단체가 내세우는 주장도, 우리의 반박도 뻔한 내용일 뿐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