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에서 제작한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리니지’에 등장하는 캐릭터.
2001년 11월 5일, 충남 논산시. 전신주에 올라가 19차례에 걸쳐 전선을 잘라 고물상에 팔아먹은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2006년 4월 10일, 쌍둥이 초등학생(당시 10세)이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어느 아파트에서 학교 친구를 흉기로 20여 차례 찔러 경찰 조사를 받았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시공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게임 아이템’. 첫 번째 사건은 온라인 게임 ‘리니지’ 아이템을 빼앗기자 자신의 아이템을 가져간 사용자를 찾아가 폭행한 것이고, 두 번째 사건은 ‘리니지’ 아이템을 사기 위해 진 1800만 원의 빚을 갚으려고 전선을 훔친 남성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쌍둥이가 친구를 찌른 이유는 피해자가 게임 아이템을 자신들에게 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전신주에 기어오르고 친구에게 흉기까지 휘두르게 하는 게임 아이템. 이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게임 아이템이 활기차게 거래되는 곳이 있다. 게이머들이 ‘리니지’만큼 즐겨 찾는 아이템베이(www.itembay .com)가 바로 그곳. 2001년 9월 국내 최초로 서비스를 시작한 국내 최대 규모의 게임 아이템 거래 중개 사이트로, 가입자만 600만 명이 넘는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 이용자(2009년 기준, 1800만여 명)의 3분의 1이 이곳의 회원인 셈. 이 사이트는 앞서 언급된 사고들처럼 게임아이템 직거레로 발생할 수 있는 폭행, 사기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게임 아이템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2002년 7월 서비스를 시작한 후발주자 아이템매니아(www .itemmania.com)와 함께 게임 아이템 현금거래 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피해자만 ‘바보 취급’ 당하기 십상
문제는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고파는 게 아닌 까닭에 이들 사이트에서 게임 아이템 거래 사기가 판을 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들 거래 사이트는 회원끼리 아이템 거래 수수료를 챙기면서도 정작 사기사건이 벌어지면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도 사기 열풍에 불을 지르는 한 요인이다. 서울서부경찰서는 2월 21일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사겠다고 속여 100여 명에게서 1억 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사기)로 김모(26)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공범인 박모(26) 씨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은 2010년 5월 4일부터 11월 25일까지 뮤 온라인 게임 이용자의 계정과 아이템을 사겠다고 속여 아이템을 건네받은 뒤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템베이에서 판매해 이를 착복했다.
사기피해 정보공유 사이트 더치트에는 ‘게임 아이템 피해사례 등록/검색’ 배너가 따로 있을 정도다. 2009년 개설된 이 사이트는 누리꾼 간 피해사례 공유를 통해 사기 피해 재발을 방지하고 피해자 간 공동 대응을 할 목적으로 운영된다. 10일 현재 2421건의 게임 아이템 사기 피해 신고 접수가 들어와 있다. 피해액도 5000원에서 600만 원까지 다양하다. 이곳에 접수되는 사기 피해는 몇 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제3의 인물이 게임에서 판매자나 구매자를 찾아 물품을 거래하자고 유혹한 뒤 이익을 챙기고 사라지거나, 거래 완료 문자나 입금증을 위조하는 사례가 대표적인 ‘사기의 정석’이다.
각 포털 게시판에는 사기를 당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피해자의 글이 계속 올라온다. 3월 10일 포털사이트 네이버 지식iN에서 ‘아이템 거래 사기’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니 5만6586건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더욱 큰 문제는 아이템 사기사건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년 동안 비슷한 피해가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사이버 공간에선 아이템 사기를 당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2월 21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아이템베이에서 게임머니 사기를 당해 현금 30만 원어치 손해를 입었다’는 글에 달린 댓글이다. 범죄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디시인사이드 범죄 갤러리 이용자 사이에서 ‘아이템베이 사기’는 지루하고 한심한 사기로 통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게임 아이템 사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걸까. 우선은 속이려는 자가 아이템을 팔려는 자의 약점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 각 게임사는 약관으로 아이템 금전거래를 금지하거나, 자신의 게임 사이트에서만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제약을 걸어놓았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갖은 방법으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한다.
이처럼 게임 사이트에서 아이템을 사고팔지 못하니 게이머들은 아이템베이 같은 ‘비공식’ 거래 사이트를 이용하는데, 개인 간의 거래이고 신뢰만으로 거래하다 보니 사기꾼이 판을 치는 것. 결국 사기당한 피해자는 아이템을 빼앗겨도 게임 사이트에 말하면 계정을 빼앗기기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아이템 사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생은 부모나 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거래를 하므로 사기를 당하면 큰 곤란에 직면한다.
“아이템매니아에서 거래하다 사기당했어요. 아이디가 엄마 거라서 걸리면 엄마한테 죽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짜 급해요. 2만3000원에 게임 아이템을 팔기로 했고, 입금했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아이템을 줬는데 나중에 보니 입금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거래자와 인수자의 아이디도 달랐어요.”(네이버 지식iN 한 중학생)
“얼마 전 아이템베이에서 거래를 통해 계정을 샀습니다. 그런데 4일 만에 원래 주인에게 해킹당해 피해를 입었어요. 40만 원 정도 손해 봤는데, 경찰에선 게임사 규정에 어긋난 방식이라 어쩔 수 없다네요. 아이템베이는 엄연히 아이템을 거래한 수수료로 돈을 버는데, 우리만 손해 보는 겁니까? 아이템베이는 불법 사이트인가요?”
한 PC방에서 청소년이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다.
2009년 1월 한 포털 사이트에 누리꾼이 올린 글처럼 거래 중개 사이트인 아이템베이가 수수료만 챙기고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도 문제다. 하지만 2010년 1월 “대법원은 온라인 게임 아이템과 게임머니를 현금으로 거래한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결론적으로 게임사 약관만 어긴 것이지, 아이템 거래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임계정 거래는 2010년 10월 이후 물품 리스트에서 전면 삭제됐다.
이 때문일까. 게임 아이템 사기는 경찰서에 신고해도 신통한 답을 얻기 어렵다. 핵심은 ‘게임 아이템을 재산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하여 착오에 빠뜨리고 그 처분 행위를 유발하여 재물을 교부받거나 재산상 이익을 얻음’으로써 성립하는데, 게임 아이템은 전자적 기호에 불과하기에 재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 이 때문에 신고 전화를 해도 사건 접수조차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민사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수밖에는 뾰족한 도리가 없다.
하지만 2월 21일 1억 원 게임 아이템 사기혐의로 일당 2명을 입건한 서울서부지검 구태연 검사는 수사 지휘서에서 “게임 아이템이 비록 전자적 부호에 불과하고 처분이 금지돼 있지만, 사기죄에서 규정한 ‘재산상의 이익’은 반드시 사법상 보호되는 경제적 이익만을 뜻하지 않는다. 현실상으로 게임 아이템은 유상으로 거래되고 있어 범죄가 성립된다”고 밝혔다. 앞으로 재판의 최종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검찰의 주장이 인정된다면 아이템 사기사건의 근절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정완 교수는 “게임 아이템 사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선 입법적 보완과 사이버 경찰의 역할을 강화하는 등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더불어 아이템 거래에서 게이머들의 신중한 자세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이템베이 홍보팀 김미정 팀장은 ”에스크로 결제 시스템 등 철저한 본인인증체제를 구축학 있어 거래 사고율은 0.001%에 못미친다. 거래사고에 대비해 200% 거래사고 보상제도 도입했다. 이용자의 권익보호를 위해 안전성과 신뢰성을 높여 나가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