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다각화를 적극 환영”
깨어나 보니 밀폐된 공간이다. 창문도 없고, 사방이 벽이다. 눈앞은 뿌옇게 흐리다. 둘러보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여기는 어디지? 난 언제부터, 왜 여기에 있지?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는 배 안이고, 이 배는 미국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 후 다른 사람을 만났다. 이 배는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으로 간다고 했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배의 행선지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러나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개중에는 배가 목적지도 없이 떠돌고 있으며, 언젠가는 난파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소문 속에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같이 지내던 사람이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배 밖으로 나가 익사했을 거라고 했고, 어떤 이는 그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다른 배로 갈아탔다고도 했다. 우리는 여기 잠깐 머물다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사라지나? 그렇다면 어디로 가나? 도무지 알 수 없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몇 년 전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문 사서를 위한 강의를 요청받은 적이 있다. 인문학이 뭔지를 구조와 역사라는 틀에 담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강의를 구상하면서, 내 이력을 되짚어보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때까지 내 삶의 대부분은 강의를 듣거나 강의를 하고, 세미나와 학회에 참여해 발표하고 토론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채워졌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인문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니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다는 건, 결국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풀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자문했다. ‘내가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내가 이런 삶을 결심한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이냐?
당시 나를 지배하던 질문은 ‘난 누구며, 왜 사는가?’였다. 내가 찾은 대답은 ‘내가 누구며 왜 사는지를 알아내는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책에서 찾았다. 철학·문학·역사를 비롯해 다양한 책을 읽었고, 곰곰이 따져보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강의하고, 학회에서 발표하고 책에 담을 글을 쓰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것이 내 일상이며, 내 생계수단이자 생존방식이 됐다. 이런 삶을 인문학자의 삶이라고 한다면, 인문학(人文學)이란 결국 ‘인간이 무엇이며 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人), 다양하고 중요한 문헌을 통해(文), 배우고 가르치는 학문적인 행위(學)’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결심 후, 내가 정성껏 다뤄온 문헌이 이른바 고전(古典)이다. 고전이란 인류가 생산한 무수한 문헌자료 중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것으로 역사의 검증을 거쳐 선택, 보전돼온 최고급 문헌이다. 그 속엔 역사상 뛰어난 통찰력을 보인 사람들이 찾아낸 인간과 사회, 역사의 비밀이 암호처럼 담겨 있다.
난 그 암호를 풀어내 내 삶의 지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맡고 있다. 이를테면 난 밀폐된 배 안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과 그 기록을 수집·검토·분석해 평가한 뒤, 가장 그럴듯한 의견을 골라 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의 정체와 목적지에 관해 불안해하며,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내겐 큰 변화가 생겼다. 난 내가 맡은 일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한정되고 규정되는 전문직일 거라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의 상당 부분이 깨졌다.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며, 대학을 거점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꾸리면서 삶의 의미와 생계수단을 찾았던 나였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대학 강단보다 대학 바깥의 공간에서 강의할 기회가 훨씬 많아졌다. 방송국, 박물관 등에서 마련한 인문학 강연에서 대규모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백화점 등의 문화센터나 사설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만난 소수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소중한 기회였다.
현실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학문
무엇보다 독특한 목적을 갖고 모인 사람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통해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남다른 사연을 안고 거리를 안식처 삼아 사는 노숙인들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함께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는 삶의 결이 두텁게 겹쳐져 단단한 켜를 이루고 있었다. 누가 과연 삶의 영웅인가? 내가 전공서적을 뒤적이며 다듬었던 해석은 깔끔했지만 인위적이었다면, 그들의 질문은 투박했지만 싱싱했고 그 뜻은 깊었다. 명예나 권력, 부가 아니라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죽는 게 진정 영웅이 아니냐는 질문의 울림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어느 날엔 아침 7시에 국회의사당에 간 적도 있다. 몇몇 국회위원과 플라톤의 ‘국가’를 함께했다. 텍스트에 대한 내 해석이 다소 관념적으로 뜨자 ‘지금의 구체적인 현실에 어떤 정치적 지침을 줄 수 있느냐’는 절박하고 치열한 질문을 해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의 모임에서 ‘정의와 이익 추구의 문제가 충돌할 때, 플라톤은 어떤 유효한 답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찔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정치도, 사업도 잘할 수 있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난 젊은 시절에 가졌던 삶에 대한 절박함을 잃고 대학의 연구실과 강의실이라는 온실 같은 공간에서 논문과 연구서에 파묻혀 개념적인 학술놀이를 즐겨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했다.
책 이전에 그 속에 담길 삶이 분명히 있다. 그 삶의 치열함이, 솔직함이 없는 책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의 고전을 섭렵하고 깊이 연구했다며 어깨에 힘주고 세상 다 아는 듯 뻐길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밀폐된 배 안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 귀에 솔깃한 그럴듯한 소문에 기대어 살아간다. 소문을 다룬다는 전문가인 나도 마찬가지다. 그 소문 중 무엇이 옳은 것이지, 우린 알 수 없다. 인간의 인식론적인 한계에도,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고 자기 의견으로 다른 소문을 억압하려 한다면 우리 삶의 공간은 반감과 분쟁으로 가득할 것이다. 다양한 청중에게 맞춰진 인문학적 강좌의 다각화는 그와 같은 혼란을 제거해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새롭게 품는 희망이며 질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아내고, 의미를 추구한다. 사람들은 사는 만큼의 사연으로 엮인 한 권의 책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인문학자로서 책을 보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의 다양한, 그 싱싱한 삶을 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나의 독서와 연구는 텅 빌 것이라 직감했다. 그 공허함이 습성으로 굳어질 때, 인문학은 위기에 빠지고 인문학자는 무능력하게 고립될 것이다. 인문학은 소수 학자의 전유물이어선 안 된다. 삶을 살아가며 그 삶을 이해하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난 다양한 사람과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문학 강좌의 확산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 함께 배를 타고 삶의 대양을 항해하는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롭게 모색한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kimcho@snu.ac.kr
“서구지향적·상업적 열풍은 가라!”
모든 사람이 인문학 열풍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힘이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인문학 비즈니스만 하는 이도 있고, 교양으로 전락한 인문학이 되레 인문정신을 흐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식을 넘어 실천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인문학 정신, 어떻게 되돌려야 할까?
우선 필자는 인문학 열풍에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서구적 근대화 지향 국가로, 아직 인문학 정신의 고양이 상당 부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참다운 인문학의 고양’을 위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 열풍 현상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당위적 요청을 정리하고자 한다.
현재의 인문학 열풍이 인문학 정신의 고양에 부응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선행돼야 한다.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인문학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문학이란 낱말은 일본어다. 19세기 일본 학자들이 ‘humanitas’를 번역하면서 만든 신한어(新漢語) ‘人文學’의 우리말 발음이다. 역사적으로 인문학이란 ‘신에 대한 탐구’에 비견되는 르네상스 시기 새로운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문학은 다름 아닌 ‘인간학’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참다운 인문학 정신’은 현실을 더욱 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인식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적 인문학 실종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지나치게 서구 지향적이다. 서구적 지식과 인문학적 깊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참다운 우리의 인문학은 서구적 지식의 무비판적인 수입이 아닌, 그러한 체계에 대한 우리의 주체적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동양적 편향도 경계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신비주의식 정신 혹은 체질요법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인간의 새로운 이해란, 기존의 동서양 혹은 ‘제3세계’라는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식이어야 한다. 서구 문명의 성과를 충분히 수용·인식하면서, 기존 논의가 지닌 제국주의적 함의를 피하는 보편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부분은 어떨까. 먼저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상업주의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물론 인문학 지식의 상업화는 필연적인 면이 있다. 이 때문에 그 자체로 폄하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상업화’와 구별되는, 상업적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주의적’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건강한 수요를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또 다른 장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또 다른 문제
‘효율성’을 모토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트렌드다. 하지만 인간의 참다운 이해를 모토로 하는 인문학마저 비판 없이 이를 추종하는 행태는 모순이다. 한국은 이제 1970년대 박정희 류의 ‘하면 된다’식 논리로 작동하는 개발도상국가가 아니다. 고도의 정보화, 민주화가 요구되는 첨단산업사회로 접어든 준(準)선진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기존의 ‘효율성 일변도’ 논리가 우리나라의 참다운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우리 기업이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구 선진국이 짜놓은 판을 뒤흔들 능력은 없다는 냉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은 효율성에서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 이는 깊이 있는 인문학적 수업으로만 가능하다.
인문학 열풍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역시 사회적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제다. 인문학을 배우겠다는 최고경영자(CEO)들의 노력은 물론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 지향적 기업을 가능케 할 참다운 투자와 이노베이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채 개인과 자신의 기업만을 배타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인문학 배우기는 새로운 인문학적 기복신앙이나 다름없다.
참다운 인문적 기업철학은 이기주의에 함몰되지도 않으며 사회적 기업의 사명을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기복신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사 기복신앙적 인문학은 기존하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나의 문제며, 내가 나의 성격을 의지로써 고쳐야 한다’는 식의 ‘성격개조’ 담론과 결합, 사회 유지 및 통제 기제로서의 개인주의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통해 기업문화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 우리의 인문학이 이러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직업적 인문학 장사꾼이나 참다운 인문학적 비전에 대한 대중의 무지와 결탁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인문학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인간이 고통과 무지의 숲을 헤매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허경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rendezvous602@yahoo.co.kr
깨어나 보니 밀폐된 공간이다. 창문도 없고, 사방이 벽이다. 눈앞은 뿌옇게 흐리다. 둘러보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여기는 어디지? 난 언제부터, 왜 여기에 있지?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는 배 안이고, 이 배는 미국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 후 다른 사람을 만났다. 이 배는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으로 간다고 했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배의 행선지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러나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개중에는 배가 목적지도 없이 떠돌고 있으며, 언젠가는 난파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소문 속에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같이 지내던 사람이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배 밖으로 나가 익사했을 거라고 했고, 어떤 이는 그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다른 배로 갈아탔다고도 했다. 우리는 여기 잠깐 머물다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사라지나? 그렇다면 어디로 가나? 도무지 알 수 없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몇 년 전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문 사서를 위한 강의를 요청받은 적이 있다. 인문학이 뭔지를 구조와 역사라는 틀에 담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강의를 구상하면서, 내 이력을 되짚어보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때까지 내 삶의 대부분은 강의를 듣거나 강의를 하고, 세미나와 학회에 참여해 발표하고 토론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채워졌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인문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니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다는 건, 결국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풀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자문했다. ‘내가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내가 이런 삶을 결심한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이냐?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서 열린 ‘소더비 인스티튜트 이언 로버슨의 세계 미술시장에서의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강연.
이런 결심 후, 내가 정성껏 다뤄온 문헌이 이른바 고전(古典)이다. 고전이란 인류가 생산한 무수한 문헌자료 중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것으로 역사의 검증을 거쳐 선택, 보전돼온 최고급 문헌이다. 그 속엔 역사상 뛰어난 통찰력을 보인 사람들이 찾아낸 인간과 사회, 역사의 비밀이 암호처럼 담겨 있다.
난 그 암호를 풀어내 내 삶의 지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맡고 있다. 이를테면 난 밀폐된 배 안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과 그 기록을 수집·검토·분석해 평가한 뒤, 가장 그럴듯한 의견을 골라 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의 정체와 목적지에 관해 불안해하며,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내겐 큰 변화가 생겼다. 난 내가 맡은 일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한정되고 규정되는 전문직일 거라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의 상당 부분이 깨졌다.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며, 대학을 거점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꾸리면서 삶의 의미와 생계수단을 찾았던 나였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대학 강단보다 대학 바깥의 공간에서 강의할 기회가 훨씬 많아졌다. 방송국, 박물관 등에서 마련한 인문학 강연에서 대규모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백화점 등의 문화센터나 사설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만난 소수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소중한 기회였다.
현실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학문
무엇보다 독특한 목적을 갖고 모인 사람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통해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남다른 사연을 안고 거리를 안식처 삼아 사는 노숙인들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함께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는 삶의 결이 두텁게 겹쳐져 단단한 켜를 이루고 있었다. 누가 과연 삶의 영웅인가? 내가 전공서적을 뒤적이며 다듬었던 해석은 깔끔했지만 인위적이었다면, 그들의 질문은 투박했지만 싱싱했고 그 뜻은 깊었다. 명예나 권력, 부가 아니라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죽는 게 진정 영웅이 아니냐는 질문의 울림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어느 날엔 아침 7시에 국회의사당에 간 적도 있다. 몇몇 국회위원과 플라톤의 ‘국가’를 함께했다. 텍스트에 대한 내 해석이 다소 관념적으로 뜨자 ‘지금의 구체적인 현실에 어떤 정치적 지침을 줄 수 있느냐’는 절박하고 치열한 질문을 해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의 모임에서 ‘정의와 이익 추구의 문제가 충돌할 때, 플라톤은 어떤 유효한 답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찔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정치도, 사업도 잘할 수 있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난 젊은 시절에 가졌던 삶에 대한 절박함을 잃고 대학의 연구실과 강의실이라는 온실 같은 공간에서 논문과 연구서에 파묻혀 개념적인 학술놀이를 즐겨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했다.
책 이전에 그 속에 담길 삶이 분명히 있다. 그 삶의 치열함이, 솔직함이 없는 책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의 고전을 섭렵하고 깊이 연구했다며 어깨에 힘주고 세상 다 아는 듯 뻐길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밀폐된 배 안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 귀에 솔깃한 그럴듯한 소문에 기대어 살아간다. 소문을 다룬다는 전문가인 나도 마찬가지다. 그 소문 중 무엇이 옳은 것이지, 우린 알 수 없다. 인간의 인식론적인 한계에도,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고 자기 의견으로 다른 소문을 억압하려 한다면 우리 삶의 공간은 반감과 분쟁으로 가득할 것이다. 다양한 청중에게 맞춰진 인문학적 강좌의 다각화는 그와 같은 혼란을 제거해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새롭게 품는 희망이며 질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아내고, 의미를 추구한다. 사람들은 사는 만큼의 사연으로 엮인 한 권의 책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인문학자로서 책을 보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의 다양한, 그 싱싱한 삶을 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나의 독서와 연구는 텅 빌 것이라 직감했다. 그 공허함이 습성으로 굳어질 때, 인문학은 위기에 빠지고 인문학자는 무능력하게 고립될 것이다. 인문학은 소수 학자의 전유물이어선 안 된다. 삶을 살아가며 그 삶을 이해하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난 다양한 사람과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문학 강좌의 확산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 함께 배를 타고 삶의 대양을 항해하는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롭게 모색한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kimcho@snu.ac.kr
“서구지향적·상업적 열풍은 가라!”
모든 사람이 인문학 열풍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힘이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인문학 비즈니스만 하는 이도 있고, 교양으로 전락한 인문학이 되레 인문정신을 흐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식을 넘어 실천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인문학 정신, 어떻게 되돌려야 할까?
우선 필자는 인문학 열풍에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서구적 근대화 지향 국가로, 아직 인문학 정신의 고양이 상당 부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참다운 인문학의 고양’을 위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 열풍 현상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당위적 요청을 정리하고자 한다.
현재의 인문학 열풍이 인문학 정신의 고양에 부응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선행돼야 한다.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인문학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문학이란 낱말은 일본어다. 19세기 일본 학자들이 ‘humanitas’를 번역하면서 만든 신한어(新漢語) ‘人文學’의 우리말 발음이다. 역사적으로 인문학이란 ‘신에 대한 탐구’에 비견되는 르네상스 시기 새로운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문학은 다름 아닌 ‘인간학’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참다운 인문학 정신’은 현실을 더욱 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인식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적 인문학 실종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지나치게 서구 지향적이다. 서구적 지식과 인문학적 깊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참다운 우리의 인문학은 서구적 지식의 무비판적인 수입이 아닌, 그러한 체계에 대한 우리의 주체적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동양적 편향도 경계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신비주의식 정신 혹은 체질요법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인간의 새로운 이해란, 기존의 동서양 혹은 ‘제3세계’라는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식이어야 한다. 서구 문명의 성과를 충분히 수용·인식하면서, 기존 논의가 지닌 제국주의적 함의를 피하는 보편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부분은 어떨까. 먼저 현재의 인문학 열풍은 상업주의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물론 인문학 지식의 상업화는 필연적인 면이 있다. 이 때문에 그 자체로 폄하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상업화’와 구별되는, 상업적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주의적’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건강한 수요를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또 다른 장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또 다른 문제
인문학 열풍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은 사회적인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다. 서울대 CEO 인문학 최고위 과정 수료식.
이 고민은 우리 기업이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구 선진국이 짜놓은 판을 뒤흔들 능력은 없다는 냉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은 효율성에서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 이는 깊이 있는 인문학적 수업으로만 가능하다.
인문학 열풍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역시 사회적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제다. 인문학을 배우겠다는 최고경영자(CEO)들의 노력은 물론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 지향적 기업을 가능케 할 참다운 투자와 이노베이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채 개인과 자신의 기업만을 배타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인문학 배우기는 새로운 인문학적 기복신앙이나 다름없다.
참다운 인문적 기업철학은 이기주의에 함몰되지도 않으며 사회적 기업의 사명을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기복신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사 기복신앙적 인문학은 기존하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나의 문제며, 내가 나의 성격을 의지로써 고쳐야 한다’는 식의 ‘성격개조’ 담론과 결합, 사회 유지 및 통제 기제로서의 개인주의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통해 기업문화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 우리의 인문학이 이러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직업적 인문학 장사꾼이나 참다운 인문학적 비전에 대한 대중의 무지와 결탁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인문학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인간이 고통과 무지의 숲을 헤매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허경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rendezvous6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