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네덜란드 풍의 풍차가 인상적인 바람의 언덕.
파도에 따라 스스로 다듬어낸 몽돌
1월 16일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을 내달려서야 거제시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해금강까지는 시내버스로 30분 남짓 더 가야 한다.
“이른바 거제현이란 데는 남방의 극변으로 물 가운데 집이 있고, 사면에는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둘러 있으며, 독한 안개가 찌는 듯이 무덥고 태풍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여름에는 벌보다 큰 모기 떼가 모여들어 사람을 문다고 하니, 참으로 두렵다.”
고려시대 시풍으로 당대를 호령한 명문장가 이규보(1168~1241)의 표현처럼, 난생처음 거제도 들머리에 도착한 이의 떨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복잡한 거제 시내를 벗어나자 푸른빛 바다가 펼쳐진다. 거제 8경 중 하나인 해금강으로 다가서는 길은 함목몽돌해수욕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거제도 해변에는 유독 몽돌이란 이름이 들어간 해변이 많다. 거제도 북쪽 끝의 유호몽돌해수욕장부터 남단의 여차몽돌해수욕장까지, 해수욕장 이름에는 어김없이 몽돌이 들어 있다. 모가 나지 않은 둥근 돌을 일컫는 몽돌은 거제도 해안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돌이다. 몽돌의 크기는 작은 조약돌부터 어른이 혼자 들기 무거운 것까지 다양하다.
몽돌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를 따라 다니며 이리저리 뒹굴었다. 스스로를 다듬고 또 다듬다 보니 뾰족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성자로 변모했다. 그런 몽돌을 보니 가슴속에 날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많은 사람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시를 드러내고 살았던가. 몽돌처럼 서로 부대끼며 모나지 않은 동그라미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몽돌해변을 걷다 보면 귀가 즐거워진다. 파도가 밀려왔다 도망치면 몽돌끼리 부딪히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마치 까르르 웃는 여고생들 웃음소리 같다. 그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몽돌에 손이 간다. 부드러운 감촉에 온기가 느껴진다.
모가 나지 않은 몽돌은 거제 해안의 특징이다.
신선들이 내려와 풍류를 즐긴 곳
“바람만 불지 않으면 봄 날씨를 느낄 수 있다”는 거제 주민의 말처럼 바닷바람이 세게 불어올 때는 옷을 단단히 여며야 했지만, 바람이 잠잠해지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10여 분을 걷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빠지면 ‘신선대’이고 왼쪽으로 가면 ‘바람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먼저 신선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잘 다듬어진 탐방로 덕에 걷는 데는 무리가 없다. 내리막길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자 기암절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신선들이 내려와 풍류를 즐겼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갓처럼 생긴 큰 바위 아래로는 자줏빛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이 바위에 제를 올리면 벼슬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절경을 눈으로만 담아 가는 것이 성에 안 차서일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을 위로 쭉 뻗고는 아기가 엄마의 젖을 물 듯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셔본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몸속 깊숙한 곳까지 후벼 판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바람의 언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커다란 네덜란드 풍의 풍차가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끈다.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 또한 운치가 있다. 차도를 따라 탐방로가 이어지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작은 어촌 마을 끄트머리와 연결된다.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 마당 한편에 생선을 한두 마리씩 놓고 말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양이들이 살짝 뛰어오르기만 해도 물고 갈 텐데’라고 괜한 걱정도 해본다.
길은 일자로 쭉 이어져 있지 않다. 굽이굽이 집들을 둘러가야 도장포 선착장이 있는 바다 쪽으로 갈 수 있다. 꼬르륵. ‘금강산도 식후경’. 허기진 배부터 달랜다. 게, 조개 등 각종 해물을 넣고 펄펄 끓인 해물된장찌개로 밥 두 그릇을 뚝딱 비운 뒤에 본격적으로 바람의 언덕을 향해 나간다. 이제부터는 다시 오르막길이다. 5분여를 걷자 왼쪽으로 벤치들이 놓여 있는 작은 언덕이 보인다.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제주 신라호텔 숨비 정원 내 ‘쉬리 벤치’가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과거 띠밭등, 망너메 등으로 불렸던 바람의 언덕은 염소들이 노니는 도장포 마을의 바닷가 언덕이었다. 바람의 언덕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거제도를 찾는 관광객이 꼭 들르는 곳이 됐지만 구수한 옛 이름이 더 정이 간다. 커다란 풍차 앞에서 사람들은 연방 사진을 찍어댄다. 바람이 놀다 가는 이곳에선 손만 갖다 대도 한 편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진다. 두 손을 가위 모양으로 한 뒤 서로 맞닿게 해 직사각형을 만들어본다. 그것의 방향이 바다로 향하든, 풍차로 향하든 일단 네모난 손가락 상자에 날것 그대로의 풍경이 담기면 그 아름다운 모습에 심장마저 가쁘게 요동친다.
바람의 언덕에서도 해금강은 아스라이 보이지만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배를 타고 직접 나가야 한다. 도장포 선착장에는 해금강을 둘러 외도까지 갔다 오는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이참에 ‘환상의 섬’으로 알려진 외도까지 가보기로 결심하고 표를 끊는다. 2시간 남짓 간격으로 배가 있기에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오후 1시 반, 드디어 배가 출발한다. 10여 분을 내달리자 불쑥 솟은 돌섬이 당당하게 서 있다. 거제 해금강은 원래 갈도(葛島·칡섬)였지만 그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1971년 명승 2호인 거제 해금강으로 등재됐다. 몸체는 한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바닷속에서 갈라진 4개의 절벽 사이로 십(十)자형 수로가 뚫려 있어 파도가 잠잠할 때면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천년의 전설 수많은 사연 머물러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옆으로 ‘쉬리 벤치’를 연상시키는 벤치들이 놓여 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영원한 생명을 꿈꿨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고자 서불과 동남동녀 3000명을 이곳 해금강에 보냈는데 이들이 백일기도를 하던 중 무료함을 달래려고 사자바위와 천년 송 사이에 줄을 달아 그네를 탔다는 것. 머릿속으로 그네 줄을 그려본다. 그네 밑은 파도가 거세게 치는 망망대해다. 자칫 빠지기라도 하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그런 곳에서 외줄의 그네를 탔다고 하니 살짝 현기증마저 인다.
사자바위 뒤편으로 미륵바위가 나타난다. 시커먼 얼굴에 눈과 코가 뚜렷한 모습이,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동양 최대 석조 미륵불을 연상시킨다. 부처님 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어부들은 출항에 앞서 만선의 소원을 빌었다. 지금도 간절히 빌면 소원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전해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가족의 건강을 빌어본다.
해금강 주변 바위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신랑바위’로 불리는 촛대바위다.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사모관대를 쓰고 조랑말을 탄 신랑의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신랑바위 앞에 신부바위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신부바위는 부서지고 말았다. 신랑 신부의 다정한 모습을 질투한 태풍이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이다. 이 밖에 두 쌍의 바위가 뽀뽀를 하는 ‘뽀뽀바위’, 선녀가 공손히 합장기도를 하는 ‘선녀바위’ 등 다양한 모습의 바위섬이 해금강을 에워싸고 있다.
해금강을 지나 10여 분을 달리자 ‘환상의 섬’ 외도가 바다 위에 다소곳이 앉아 객을 맞이한다. 외도는 1969년 이창호·최호숙 씨 부부가 섬을 사들였다가 1995년 4월 14일 외도 해상농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2005년 9월부터 ‘환상의 식물원’이라는 뜻을 가진 외도 보타니아(Oedo-Botania)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7년 8월 입장객 10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매년 100만 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 거제의 대표적인 명소다.
빨간 기와가 앙증맞은 아치형 정문을 지나 섬 둘레 길을 걷는다. 14만5000여㎡(4만4000여 평)의 천연 동백 숲으로 이뤄진 외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물원이다. 아열대 식물인 선인장, 코코스 야자수, 가자니아, 선샤인, 유카리, 병솔, 잎새란, 용설란 등 3000여 종의 수목이 어우러져 있는 그 풍치는 한국의 파라다이스라 할 만큼 아름답다. 섬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또 다른 보너스.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걷다 보면 마치 파티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10여 분을 걸으니 남국의 멋을 자랑하는 야자나무가 의젓하게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요상하다. 마치 반쯤 물어뜯은 프라이드치킨 다리 조각 같다. 치킨 다리가 줄지어 서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배가 부르다. 야자나무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50여 종의 선인장이 있다는 ‘선인장 동산’이 나타난다.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 있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봄이 되면 야외로 얼굴을 슬그머니 내민다.
이국적 향취로 가득 찬 외도
이국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외도 보타니아 ‘비너스 가든’.
아무것도 없는 돌섬이 어떻게 이런 환상의 섬으로 바뀌었을까. 비너스 가든의 개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조그만 분교가 있던 곳에 잔디를 가꾸고 동백나무를 심어 지금의 절경이 완성됐다. 최소한의 훼손과 제한된 개발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을 유지하겠다는 설립자의 마음 씀씀이가 이런 환상의 공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제 바다 냄새와 꽃향기에 취해 자유로이 정원을 거닐어본다. 이 순간만은 호사로운 왕궁을 거니는 유럽의 왕이 부럽지 않다.
외도 산책로는 마실 나가듯 가벼운 걸음으로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물론 빼어난 풍광에 눈을 뺏겨 걸음을 멈춘다면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오감으로 외도를 흠뻑 느꼈다면 이제는 선착장으로 내려가야 할 때. 그 길목에 ‘천국의 계단’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아왜나무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태피스트리(tapestry)를 만들고 있다. 원래 주민들이 밭을 일구던 자리에 밀감나무 3000그루를 심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방품림으로 심은 편백나무 8000그루가 자연스레 천국의 계단으로 변모했다.
천국의 계단에 들어서면 생의 마지막 길목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양옆으로 다양한 희귀식물이 진한 꽃향기를 내뿜는다. 꾹꾹 감춰둔 생의 비밀이 밝혀지려는 찰나, 어느새 입구에 다다랐다. 짙푸른 파도를 헤치며 다시 도장포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해금강 여행은 끝이 난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바다의 금강산이란 풍문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곳이 바로 거제 해금강이다.
Basic info.
☞ 교통편
버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거제 고현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20~30분 배차간격, 4시간 30분 소요).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66번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다 함목몽돌해수욕장에서 내린다.
자동차 | 한남오거리 고가도로에서 경부고속도로 한남 IC → 비룡분기점에서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 → 통영톨게이트 지나 거가대교/시청/고현동 방면으로 우회전 → 상동삼거리 우측 방향(1018번 지방도) → 학동삼거리 해금강/남부 방면으로 우회전(거제대로) → 함목삼거리 해금강테마박물관/해금강 방면으로 좌회전(해금강로)하면 도장포 유람선터미널(055-632-8787). 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도장포) 292-6
코스
함목몽돌해수욕장 → 신선대 → 바람의 언덕 → 도장포 선착장 → 해금강 → 외도 보타니아 → 선인장 동산 → 비너스가든 → 천국의 계단 → 도장포 선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