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툭 터질 듯 북받쳐오는 울음을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았다.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고 싶은 듯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저희가 드라마를 만들고 연기를 하고 모든 스태프가 작업에 참여할 때 그 결과물이나 과정, 그게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이 배우가 어떻네, 저 배우가 어떻네 하면서 시청률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지난해 12월 31일 SBS 연기대상에서 정치드라마 ‘대물’로 대상을 받은 탤런트 고현정(40)의 수상소감 중 일부다. 지난해 8월 31일 전남 담양군에서 첫 촬영을 시작해 12월 23일 마지막 촬영을 마칠 때까지 4개월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담당 작가가 바뀌고, 곧바로 감독이 교체됐다.
고현정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연꽃에 비유했다. “대물을 하면서 현장에서 연꽃 같은 것을 봤어요. 정말 어려운 상황이고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우리 스태프가 마음을 먹고 어떻게 촬영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이렇게 갈 수 있구나’라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습니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비유된다. 고현정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라마를 제작한 배우와 제작진의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하지만 이날 고현정의 수상소감은 새해 초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 누리꾼은 “시청자에게 훈계조였다”느니 “겸손하지 못하다”느니 “오만하다”고 비판했고, 언론은 이를 실시간으로 기사화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현정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곧바로 사과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1월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고현정을 만났다. 그간의 속내는 어떤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국내 최초의 여성 대통령 역을 연기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지, 재벌가와 이혼해 ‘돌싱’(돌아온 싱글)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과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논란이 된 수상소감을 말하게 된 속사정부터 털어놨다.
“나도 대물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정말 패닉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감독도 새로 오고, 작가가 바뀌면서 6편 정도를 생방송처럼 찍었다. 촬영 현장에서 기다리면 대본이 온 적도 있고, 그 자리에서 대본을 새로 쓰거나 지우기도 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거였다. 대물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방송한 작품이다. 다른 문제로 스태프들이 와해될 분위기까지 갔다. 나도 사실 ‘이거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순간까지 갔다.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스태프들을 다독였다. 여배우가 할 몫은 아닌데 돼지고기를 잘 못 먹는데도 삼겹살집에 데려가서 이러지 말자 (설득)했다. 그래서 막상 대상 수상자로 호명이 되니까 시청자가 나랑 같은 입장인 줄 알았다. (이런저런 사정을 거두절미한 부분이 많아서) 시청자분들은 언짢았을 것 같다. 내가 잘못했다. 상을 받아서 기분도 좋고, 이것저것 할 말도 많고,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잘 정리되지 못한 소감을 말한 건 실수다.”
▼ 시청률 이야기는 왜 꺼낸 건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환경에서 제작했는데도 25%의 시청률이 계속 나왔다. 정말 칭찬받고 싶었다. 배우들은 물론 카메라, 조명감독, 막내들까지 고생 많이 했다. 사실 시상식장에 가고 싶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스태프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대물이 너무 초라하게 끝나는 것도 싫었다. 스태프들도 시상식장에 꼭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나가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김철규 감독이 얼마나 고마운지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 제작 초기 담당 감독과 작가가 바뀐 이유가 무엇인가. 제작사와의 마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피하는 게 아니다. 중간에 와해되는 현장을 보면서 (그 이유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고, 방송은 바로바로 이어져야 했다. 3, 4일에 120~130분 분량을 찍어야 했다. 정말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순수한 작품이 나온 거다(웃음). 시상식 때 연꽃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연꽃이 피는 것을 봤다. 말도 안 되는 제작환경에서 스태프는 연꽃을 피워냈다. 이것 자체가 정치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새로 온 김철규, 조현탁 두 감독도 기적적인 연출력을 발휘했다. 중간에 화를 낸 배우도 많았고, 대본을 집어던지는 배우도 있었다. 이런 XX 같은 대본으로 연기를 하라느냐며 튕겨나가는 배우도 많았다. 감독들은 그들을 다 끌어안고 갔다.”
▼ 드라마를 끝내고 난 지금 심경은 어떤가?
권력 쓴맛과 단맛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너무 미진해서 속상하고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가슴을 때리고 싶다. 권상우도 아무 사심 없이 열심히 (연기)했고, 차인표 선배처럼 마음이 깨끗한 배우가 함께했다. 그런데 구슬이 서 말이면 뭐 하나. 꿰어야 했는데 줄이 확 끊어져서 쟁반에 흩어져버렸다.”
드라마 ‘대물’은 방송 시작과 동시에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야 대권후보군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고현정이 2009년 MBC 연기대상을 받은 ‘선덕여왕’ 미실 역도 박 전 대표와 비교되곤 했다. 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합쳐놓은 듯한 ‘민우당’이라는 드라마 속 집권 여당의 당명도 논란 대상이 됐다.
▼ 정치 경험이 전혀 없을 텐데, 연기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
“(웃음) 없다. 결혼생활을 할 때였는데, 모 스포츠지에 만화가 연재된 것을 재밌게 봤다. 그래서 그게 인연이 됐는지…. (드라마 속 주인공) 서혜림이라는 역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드라마 시작 전에 대본이 안 나와서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다만 오종록 감독이 초반에 인물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해줬고 가닥도 잡아줬다. 그래서 오 감독께 많이 의지했는데, 어느 날 촬영장에 나오지 않더라. 많이 아쉬웠다.”
▼ 드라마 속 서혜림이 궁극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정치를 몰라라 하지 말라는 거다. ‘정치?’ 이렇게만 생각하면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온다는 거다. 간접경험이긴 한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는 그나마 관심이 있는데, 정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구청장 같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다. 정치는 나와 내 아이들과 가정, 사회와 모든 것에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 미실과 서혜림, 두 역할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게 권력이다. 연기를 하면서 권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그동안) 권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번 연기대상 수상소감을 통해 느낀 건데, (사람들이) 내가 권력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아, 권력은 이래서… ‘한번 잡으면 안 놓으려고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뭔지 살짝 알겠더라. 내가 진짜 권력을 잡아본 사람도 아닌데, 그런 류의 역할을 했다고 벌써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실’을 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수직이든, 앞으로든 뒤든 이미 자리가 옮겨져 있지 않나.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더라. 그걸 몰라라 하면 잘못하는 거다.”
▼ 직무유기 같은 것?
“그렇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누군가 잡았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본인이 그 (권력의) 맛을 느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권력은 내가 느끼기 전에 주위에서 먼저 느껴서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권력의 피해자가 되는, 그러면 피해를 다시 복원하고 싶어서 계속 가게 되는 것 같다.”
▼ 연예인 출신 정치인도 적지 않다. 실제 정치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
“그러기엔 너무 예쁘지 않나(웃음). 이건 정말 농담이다, 또 오해받을라. 정치…(웃음) 이런 단어를 쓰다니, 정치는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많이 한다. 거기도 필요하다.”
▼ 만약 선배 연예인이나 누군가 선거 때 유세를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이번 작품을 할 때 실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때 3년 웃을 걸 다 웃었다. 난 일단 작가가 필요하고 감독, 스타일리스트, 협찬사 다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치를 못한다.”
▼ 여성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질문 자체가 굉장히 가부장적이다. 지금 너무 늦었다.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인 나라에 여성 인물이 너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도 없는 것일 수 있다. 더 다양해져야 한다. 전체적으로 정치인의 경쟁력이 너무 없다. 박근혜 전 대표 같은 정치인이 한 명이라서 아쉽다. 매력적인 남성 정치인도 더 많아야 한다. 진짜 좋아할 만한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죽겠으니까 이혼도 하게 되더라
▼ 어떤 정치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정치인은) 일단 유머가 없다. 외모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뭔가 주의를 환기해줘야 그 안의 것도 들여다볼 것 같은데, 너무 안전하게만 간다. 그러니 관심이 없고 지루하고 그렇다. 그런 면에서라도 박 대표는 꼭 나오면 좋겠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고현정은 재미있는 인생을 추구한다. 따분한 건 싫다. 가끔 사람을 시험하기도 하고, 몰래카메라로 선후배를 놀리는 것을 즐긴다.
“몰카를 수시로 한다. 몇 초를 위해 몇 시간씩 숨어 있었던 적도 있다. 다들 깜빡 속는다. 아쉬운 건 그때 연기가 최고인 것 같다. 내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1990년 연예계 데뷔, 1995년 삼성가인 정용진 신세계백화점 부회장과 결혼, 2003년 이혼, 2005년 연예계 복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과거 속에서 그 나름의 인생 즐기는 법을 배운 것일까.
“요즘에는 왜 이렇게 웃음이 많은지. 다 웃기고, 다 재미있는 것 같다. 아직 철이 없는 것 같다. 대물을 찍을 때 사춘기가 다시 온 듯하다고 그랬다. 그 안 좋은 상황에서도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정말 많이 웃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 혹시 결혼 전과 후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나.
“결혼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클래식한 정의처럼 나 자신은 어떤지 생각도 안 해보고 내 사랑도 그래야 한다고 세뇌돼 있었던 것 같다. 이혼은 나에게 큰일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니까, 다양하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뭔지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진짜 사랑을 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지난해 마흔이었다. 나이 듦이 얼마나 괜찮은 건지도 살짝 알게 됐다. 남자 배우들을 만나면 예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면서 다 보게 된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구경하는 거다. 이 즐거움이 웬만한 사랑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재미있다.”
▼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슬픈 일이다. 왜 슬픈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나?
“내가 죽겠으니까, 그것도 하게 되더라. 내가 먼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이유였다. 내가 함량 미달이든 초과든 누가 내 숨을 막고 있는데, 산소가 없어서 곧 죽을 것 같은데, 지금 산소가 필요하다, 살아야겠다. 그랬다.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는, 그런 위인은 아닌 것 같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아주 간출하게 정리했다. 미련도 없다.”
▼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바로 확!”
▼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남고 싶나?
“그냥 산뜻한 엄마로 남고 싶다. 아이들에게 짐이 안 됐으면 좋겠다. 욕심이 있다면 내가 잘 살아서 다른 면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든지, 그런 감정적인 면에서는 성숙한 조언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당분간 휴식을 취한 고현정은 5월, 다시 새롭고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도전할 계획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90학번 동기들과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 제작과 감독, 극본 모두 대학시절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이 맡고 고현정의 몫은 주연배우다. 그가 다시 어떤 모습으로 팬과 국민 앞에 나타날지 기대된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저희가 드라마를 만들고 연기를 하고 모든 스태프가 작업에 참여할 때 그 결과물이나 과정, 그게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이 배우가 어떻네, 저 배우가 어떻네 하면서 시청률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지난해 12월 31일 SBS 연기대상에서 정치드라마 ‘대물’로 대상을 받은 탤런트 고현정(40)의 수상소감 중 일부다. 지난해 8월 31일 전남 담양군에서 첫 촬영을 시작해 12월 23일 마지막 촬영을 마칠 때까지 4개월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담당 작가가 바뀌고, 곧바로 감독이 교체됐다.
고현정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연꽃에 비유했다. “대물을 하면서 현장에서 연꽃 같은 것을 봤어요. 정말 어려운 상황이고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우리 스태프가 마음을 먹고 어떻게 촬영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이렇게 갈 수 있구나’라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습니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비유된다. 고현정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라마를 제작한 배우와 제작진의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하지만 이날 고현정의 수상소감은 새해 초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 누리꾼은 “시청자에게 훈계조였다”느니 “겸손하지 못하다”느니 “오만하다”고 비판했고, 언론은 이를 실시간으로 기사화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현정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곧바로 사과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1월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고현정을 만났다. 그간의 속내는 어떤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국내 최초의 여성 대통령 역을 연기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지, 재벌가와 이혼해 ‘돌싱’(돌아온 싱글)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과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논란이 된 수상소감을 말하게 된 속사정부터 털어놨다.
“나도 대물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정말 패닉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감독도 새로 오고, 작가가 바뀌면서 6편 정도를 생방송처럼 찍었다. 촬영 현장에서 기다리면 대본이 온 적도 있고, 그 자리에서 대본을 새로 쓰거나 지우기도 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거였다. 대물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방송한 작품이다. 다른 문제로 스태프들이 와해될 분위기까지 갔다. 나도 사실 ‘이거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순간까지 갔다.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스태프들을 다독였다. 여배우가 할 몫은 아닌데 돼지고기를 잘 못 먹는데도 삼겹살집에 데려가서 이러지 말자 (설득)했다. 그래서 막상 대상 수상자로 호명이 되니까 시청자가 나랑 같은 입장인 줄 알았다. (이런저런 사정을 거두절미한 부분이 많아서) 시청자분들은 언짢았을 것 같다. 내가 잘못했다. 상을 받아서 기분도 좋고, 이것저것 할 말도 많고,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잘 정리되지 못한 소감을 말한 건 실수다.”
▼ 시청률 이야기는 왜 꺼낸 건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환경에서 제작했는데도 25%의 시청률이 계속 나왔다. 정말 칭찬받고 싶었다. 배우들은 물론 카메라, 조명감독, 막내들까지 고생 많이 했다. 사실 시상식장에 가고 싶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스태프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대물이 너무 초라하게 끝나는 것도 싫었다. 스태프들도 시상식장에 꼭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나가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김철규 감독이 얼마나 고마운지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 제작 초기 담당 감독과 작가가 바뀐 이유가 무엇인가. 제작사와의 마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피하는 게 아니다. 중간에 와해되는 현장을 보면서 (그 이유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고, 방송은 바로바로 이어져야 했다. 3, 4일에 120~130분 분량을 찍어야 했다. 정말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순수한 작품이 나온 거다(웃음). 시상식 때 연꽃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연꽃이 피는 것을 봤다. 말도 안 되는 제작환경에서 스태프는 연꽃을 피워냈다. 이것 자체가 정치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새로 온 김철규, 조현탁 두 감독도 기적적인 연출력을 발휘했다. 중간에 화를 낸 배우도 많았고, 대본을 집어던지는 배우도 있었다. 이런 XX 같은 대본으로 연기를 하라느냐며 튕겨나가는 배우도 많았다. 감독들은 그들을 다 끌어안고 갔다.”
▼ 드라마를 끝내고 난 지금 심경은 어떤가?
권력 쓴맛과 단맛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너무 미진해서 속상하고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가슴을 때리고 싶다. 권상우도 아무 사심 없이 열심히 (연기)했고, 차인표 선배처럼 마음이 깨끗한 배우가 함께했다. 그런데 구슬이 서 말이면 뭐 하나. 꿰어야 했는데 줄이 확 끊어져서 쟁반에 흩어져버렸다.”
드라마 ‘대물’은 방송 시작과 동시에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야 대권후보군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고현정이 2009년 MBC 연기대상을 받은 ‘선덕여왕’ 미실 역도 박 전 대표와 비교되곤 했다. 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합쳐놓은 듯한 ‘민우당’이라는 드라마 속 집권 여당의 당명도 논란 대상이 됐다.
▼ 정치 경험이 전혀 없을 텐데, 연기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
“(웃음) 없다. 결혼생활을 할 때였는데, 모 스포츠지에 만화가 연재된 것을 재밌게 봤다. 그래서 그게 인연이 됐는지…. (드라마 속 주인공) 서혜림이라는 역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드라마 시작 전에 대본이 안 나와서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다만 오종록 감독이 초반에 인물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해줬고 가닥도 잡아줬다. 그래서 오 감독께 많이 의지했는데, 어느 날 촬영장에 나오지 않더라. 많이 아쉬웠다.”
▼ 드라마 속 서혜림이 궁극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정치를 몰라라 하지 말라는 거다. ‘정치?’ 이렇게만 생각하면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온다는 거다. 간접경험이긴 한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는 그나마 관심이 있는데, 정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구청장 같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다. 정치는 나와 내 아이들과 가정, 사회와 모든 것에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 미실과 서혜림, 두 역할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게 권력이다. 연기를 하면서 권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그동안) 권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번 연기대상 수상소감을 통해 느낀 건데, (사람들이) 내가 권력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아, 권력은 이래서… ‘한번 잡으면 안 놓으려고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뭔지 살짝 알겠더라. 내가 진짜 권력을 잡아본 사람도 아닌데, 그런 류의 역할을 했다고 벌써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실’을 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수직이든, 앞으로든 뒤든 이미 자리가 옮겨져 있지 않나.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더라. 그걸 몰라라 하면 잘못하는 거다.”
▼ 직무유기 같은 것?
“그렇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누군가 잡았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본인이 그 (권력의) 맛을 느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권력은 내가 느끼기 전에 주위에서 먼저 느껴서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권력의 피해자가 되는, 그러면 피해를 다시 복원하고 싶어서 계속 가게 되는 것 같다.”
▼ 연예인 출신 정치인도 적지 않다. 실제 정치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
“그러기엔 너무 예쁘지 않나(웃음). 이건 정말 농담이다, 또 오해받을라. 정치…(웃음) 이런 단어를 쓰다니, 정치는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많이 한다. 거기도 필요하다.”
▼ 만약 선배 연예인이나 누군가 선거 때 유세를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이번 작품을 할 때 실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때 3년 웃을 걸 다 웃었다. 난 일단 작가가 필요하고 감독, 스타일리스트, 협찬사 다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치를 못한다.”
▼ 여성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질문 자체가 굉장히 가부장적이다. 지금 너무 늦었다.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인 나라에 여성 인물이 너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도 없는 것일 수 있다. 더 다양해져야 한다. 전체적으로 정치인의 경쟁력이 너무 없다. 박근혜 전 대표 같은 정치인이 한 명이라서 아쉽다. 매력적인 남성 정치인도 더 많아야 한다. 진짜 좋아할 만한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죽겠으니까 이혼도 하게 되더라
▼ 어떤 정치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정치인은) 일단 유머가 없다. 외모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뭔가 주의를 환기해줘야 그 안의 것도 들여다볼 것 같은데, 너무 안전하게만 간다. 그러니 관심이 없고 지루하고 그렇다. 그런 면에서라도 박 대표는 꼭 나오면 좋겠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고현정은 재미있는 인생을 추구한다. 따분한 건 싫다. 가끔 사람을 시험하기도 하고, 몰래카메라로 선후배를 놀리는 것을 즐긴다.
“몰카를 수시로 한다. 몇 초를 위해 몇 시간씩 숨어 있었던 적도 있다. 다들 깜빡 속는다. 아쉬운 건 그때 연기가 최고인 것 같다. 내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1990년 연예계 데뷔, 1995년 삼성가인 정용진 신세계백화점 부회장과 결혼, 2003년 이혼, 2005년 연예계 복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과거 속에서 그 나름의 인생 즐기는 법을 배운 것일까.
“요즘에는 왜 이렇게 웃음이 많은지. 다 웃기고, 다 재미있는 것 같다. 아직 철이 없는 것 같다. 대물을 찍을 때 사춘기가 다시 온 듯하다고 그랬다. 그 안 좋은 상황에서도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정말 많이 웃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 혹시 결혼 전과 후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나.
“결혼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클래식한 정의처럼 나 자신은 어떤지 생각도 안 해보고 내 사랑도 그래야 한다고 세뇌돼 있었던 것 같다. 이혼은 나에게 큰일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니까, 다양하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뭔지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진짜 사랑을 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지난해 마흔이었다. 나이 듦이 얼마나 괜찮은 건지도 살짝 알게 됐다. 남자 배우들을 만나면 예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면서 다 보게 된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구경하는 거다. 이 즐거움이 웬만한 사랑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재미있다.”
▼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슬픈 일이다. 왜 슬픈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나?
“내가 죽겠으니까, 그것도 하게 되더라. 내가 먼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이유였다. 내가 함량 미달이든 초과든 누가 내 숨을 막고 있는데, 산소가 없어서 곧 죽을 것 같은데, 지금 산소가 필요하다, 살아야겠다. 그랬다.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는, 그런 위인은 아닌 것 같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아주 간출하게 정리했다. 미련도 없다.”
▼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바로 확!”
▼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남고 싶나?
“그냥 산뜻한 엄마로 남고 싶다. 아이들에게 짐이 안 됐으면 좋겠다. 욕심이 있다면 내가 잘 살아서 다른 면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든지, 그런 감정적인 면에서는 성숙한 조언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당분간 휴식을 취한 고현정은 5월, 다시 새롭고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도전할 계획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90학번 동기들과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 제작과 감독, 극본 모두 대학시절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이 맡고 고현정의 몫은 주연배우다. 그가 다시 어떤 모습으로 팬과 국민 앞에 나타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