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며 한꺼번에 장을 볼까도 생각했지만 남은 음식이나 재료가 음식물 쓰레기가 되기 십상인 현실을 인정하며 일단 점심 한 끼만 준비하기로 했다. 전날 과음한 탓에 배 속에서 찾는 메뉴는 북엇국. 일회용 북엇국이 2250원, 210g 햇반 하나가 800원이다. 진열장에 포장김치(1000원)가 보였다. 배추 파동 이후 한동안 매장에서 사라졌던 김치. 배추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2주 만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몇 개 남지 않았다. 재빨리 장바구니에 김치를 담고, 김(1000원)과 생수(1000원)를 사는 것으로 장보기를 마쳤다. 점심 한 끼 준비에 6050원을 썼다. 마트를 나오자 건너편에 북엇국이 4000원이라고 써 붙인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사먹는 게 더 싸잖아!
“요즘 같으면 차라리 사먹는 게 싸요”
TV나 신문에서 연일 물가가 올랐다고 아우성이지만 하루하루가 바쁜 직장인, 그중에서도 집안 살림과는 담을 쌓은 남성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단골 술집의 술값이 올랐다면 모를까, ‘배추 한 통에 1만 원이 넘는다’ ‘전체 소비자물가가 3.6% 올랐다’는 말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직접 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굳이 복잡한 통계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돈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총각 기자의 한 끼 준비가 이렇게 고민스러운데, 매일 가족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부들의 시름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10월 16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액세서리 가게에서 동전주머니 만드는 부업을 하던 30, 40대 주부들은 입을 모아 “요즘 같으면 장을 보느니 차라리 외식을 하는 게 싸게 먹힌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지난해와 비교해 30% 가까이 장바구니 물가가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선식품은 물론 애들 과자류까지 전부 가격이 뛰었어요. 생선도 자반류를 제외하곤 다 올랐습니다. 콩나물 빼고는 안 오른 게 없네요(웃음).”
9월 생선과 채소 등 신선식품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5.5%나 올랐다. 열무와 상추는 3배 이상 뛰었고, 배추와 무도 2배 넘게 비싸지면서 가계를 운영하는 주부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요즘 백합조개 3000원어치를 사면 두세 달 전에 사던 양의 반도 안 돼요. 같은 양만큼 사려니깐 7000원을 줘야 했어요. 1500원에 30cm 정도의 무 한 개를 샀는데 이젠 3분의 1토막이 1700원이나 해요.”
4인 가족이 해물찌개를 먹으려면 순수하게 재료비만 ‘꽃게(1만5000원)+백합조개(7000원)+미더덕(600원)+미나리(600원)+쑥갓(650원)+무(1700원)’를 더해서 2만5550원이 든다. 여기에 조리하는 데 드는 연료비와 요리를 만든 사람의 인건비까지 포함시켜야 정확한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해물탕집에서 파는 2~3인분 해물찌개는 2만~3만 원. 변씨의 말대로 외식을 하는 쪽이 싸다.
“식당에서 먹으면 밑반찬도 나오고 설거지를 안 해도 되잖아요(웃음). 정말 물가가 많이 올라서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게 손해죠.”
“정부가 살림을 몰라도 너무 몰라”
주부 안채영 씨는 “g당 가격이 몇십 원 올라도 당장 장을 볼 때 1~2만 원이 추가로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고기 가격이 오르면 좀 참고 안 먹으면 돼요. 하지만 채소는 다르잖아요. 터무니없이 비싸도 안 먹을 수 없는데….”(안채영·35)
“배춧값이 오를 대로 오른 뒤에야 중국 배추를 수입한다고 난리를 쳤죠. 주부들 눈에는 다 쇼로 보여요. 김장하는 데 배추만 필요한가요? 무도 있어야 하고, 고춧가루도 들어가고, 갖은 양념이 필요한데 그런 것 가격도 만만치 않게 올랐거든요.”(박광미·35)
계절적 요인으로 신선제품의 가격만 오른 게 아니다. 보기 좋게 포장된 고급과자는 개당 2000원을 훌쩍 넘어 장바구니에 넣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주부들의 손길은 ‘3개 1000원’ 하는 묶음 과자에 머문다. 그러나 이런 과자가 정말 싼 걸까? 눈 밝은 주부들은 가격을 유지하는 제품일수록 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안다. 안채영 씨는 “과자도 g당 단가가 20~30원씩 올랐다”고 말했다.
“솔직히 g당 단가는 잘 확인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애들이 먹는 과자의 양이 너무 적어서 자세히 보니 포장만 크고 내용물이 너무 적은 거예요. 한 봉지로는 나눠 먹을 것도 없어요.”
이처럼 10원, 20원 오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친다. 박광미 씨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마트에서는 g당 가격으로 표시하죠. 예를 들어 100g에 250원 하던 게 298원으로 오르는 식이죠. 겨우 50원 오른 것 가지고 왜 그리 난리냐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직접 장을 보거나 가계부를 써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부들은 장을 볼 때 g단위로 사지 않는다. 예컨대 쑥갓이 100g에 650원이면, 300g을 사는 것이 아니라 3000원어치를 산다. 쑥갓 3000원어치는 g단위로 460g쯤 된다. 가격이 오르기 전 100g에 300원일 때는 같은 양(460g)을 사는 데 1383원이었다. 요즘은 쑥갓 하나 사는 데 1600원이 더 든다. 이런 식으로 물품마다 g당 50원, 100원씩 오르다 보면 한 번 장을 볼 때마다 지갑에서 1만~2만 원이 더 빠져나간다. 일주일에 두 번 장을 보는 집에서는 식재료 구입비가 2만~4만 원 추가로 들어 한 달로 계산할 경우 8만~16만 원이나 된다.
먹고사는 문제만큼 절박한 게 자녀 교육이다. 30, 40대 부부의 지출 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교육비다. 본격적인 사교육이 시작되기 전인 취학 전 아동이라도 유치원 비용부터가 만만치 않다.
“정작 유치원 수강료는 큰 부담이 없는데 특강비, 현장학습비, 재료비 명목으로 붙는 기타 비용이 너무 많아요. 어떤 때는 배보다 배꼽이 커요.”
주부 A씨의 딸이 다니는 유치원의 한 달 수강료는 24만 원. 국가로부터 절반가량을 지원받아 실제 지불하는 금액은 11만 원 정도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치원생은 영어, 체육, 음악 등 특별활동을 추가로 배운다. 횟수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지만 대략 과목당 3만 원 정도 특강비를 낸다. 발레나 뮤지컬 잉글리시 같은 전문 과목을 추가하면 비용은 4만~8만 원으로 뛴다. A씨의 딸이 4과목의 특별활동을 배우는 데는 월 18만 원이 든다. 여기에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현장학습비 10만 원도 추가해야 한다. 또 6개월마다 내는 재료비 70만 원을 감안하면 A씨가 매달 유치원에 지불하는 금액은 50만 원이 넘는다.
주부들은 “덜 먹는 게 낫지 애들 교육비는 못 줄이겠다”고 토로한다. 결국 수입의 대부분이 먹고 가르치는 데 들어가면 저축할 여력이 없다. 박광미 씨는 “재테크는커녕 적금이라도 깨서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유독 예·적금을 깨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애들 키우면서 매달 꼬박 적금 붓기가 벅차요. 불입액을 줄이다가 그것도 안 되면 포기하는 거죠.”
물가 인상은 가족의 삶 피폐화하는 주범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2008년 개인순저축률은 2.6%로 독일(11.2%), 프랑스(11.6%), 일본(3.8%), 미국(2.7%)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여윳돈 자체가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금리가 낮아 저축을 안 한다’ ‘코스피 지수가 2000을 향해 달려가는 만큼 늦기 전에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는 사치스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저축은 포기하고 빚만 안 져도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가계지출을 맞춰보지만 더 큰 산이 버티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전세가격이다. 광진구에 사는 주부 박모(35) 씨는 2년 전 1억4000만 원에 전세계약을 했는데 최근 계약 연장을 앞두고 주인집에서 3000만 원 이상 올려달라고 해서 곤혹을 치렀다.
“먹을거리 가격은 그것 하나 오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먹을거리로 1만 원, 2만 원씩 더 나가면 결국 어디선가 줄여야 하고, 교육비나 다른 지출이 늘어나 붓던 적금도 깨는 판이니 돈을 모으고 싶어도 모을 수가 없어요. 일반 가정에서 애들 키우며 불과 2년 만에 3000만 원 모으기가 어디 쉽나요?”
박씨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간신히 1억8000만 원에 전세계약 연장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집을 비워주고 더 싼 집을 찾아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 같은 지역에서 1억4000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던 주부 B씨는 주인으로부터 2000만 원을 올려달라는 요구를 받고 살던 집을 포기했다. 백방으로 새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원래 전세금에 맞는 집을 구할 수 없었다. 이미 그 동네 전세가격이 일제히 뛰었기 때문이다. 결국 B씨는 원래 살던 곳에서 100여m 떨어진 보증금 90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을 내는 반전세 형태의 집으로 옮겼다. B씨는 “오르는 물가에 당장 가계 꾸리기가 바빠 돈을 모을 틈이 없었는데 갑자기 전세금을 올려달라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털어놨다.
“전세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반전세나 월세로 돌리는 집을 많이 봤습니다. 월세로 20만~30만 원씩 내면 서민들은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교육비를 줄여야겠지요.”
B씨의 사례에서 보듯, 전세에서 ‘월세’ 혹은 전세와 월세가 섞인 ‘반전세’로의 전환이 서민들을 옥죄고 있다. 특히 재개발 아파트의 입주 2년을 맞은 서울 잠실 일대에선 전세계약 만료 가구가 쏟아져 나오며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상황이다. 월세 또는 반전세 전환의 요구는 판교신도시 등 수도권에도 확산되고 있다. 일부 신도시에선 잔금을 치르지 못해 입주하지 못한 집주인들이 이자비용이라도 충당하려고 앞다퉈 월세를 놓으면서 전세 매물이 사라졌을 정도다. 월세나 반전세로의 전환이 부담스러운 전세수요는 경기 일산·파주, 용인 등 서울 외곽으로 아예 빠져나가 버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기가 나서 전세금에 돈을 보태 집을 구매하는 이도 조금씩 늘고 있다. 주부 송모(41) 씨는 기존 전세금에다 시중은행으로부터 9000만 원을 빌려 2억5000만 원짜리 빌라를 구입했다. 거치기간 3년에 이자율은 5% 초반. 지금은 이자만 매달 40만 원씩 낸다. 갑작스러운 이자 부담으로 송씨의 가계부도 적자를 면치 못한다. 현재 송씨의 가계 총 지출비용은 200만 원. 주택담보대출 이자비용 40만 원은 총 지출액의 25%에 해당한다. 원리금 상환이 이뤄지면 월 100만 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단돈 만 원이 아쉬운 상황에서 먹을거리의 가격 상승은 치명적이다.
‘먹을거리 가격 상승→전체 가계지출비용 증가→적금 등 재테크 금액 감소’의 악순환과 전세대란이 맞물리면서 서민들이 서울 외곽으로, 월세방으로 밀려나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다. 이날 모인 주부들의 고민 역시 물가 문제가 단순히 식재료 값 몇 % 오르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보이시죠? 이런 동전주머니 하나 만들면 10~20원 남습니다. 이렇게 부업이라도 하는 것은 서민들로선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기 때문이죠. 물가가 올라 양파값이 몇백 원 비싸졌구나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우리 가족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