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말 서울 모 병원에 신종플루 검사를 받으러 몰려든 시민들. 올해 재연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첫 신종 인플루엔자A(H1N1 : 이하 신종플루) 사망자가 나온 지 딱 1년 만인 8월 10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플루 대유행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2009년 4월 미국과 멕시코에서 변종바이러스 감염 사례가 발견돼 세계가 신종플루 공포에 떨 때도 “남의 나라 이야기”라며 뒷짐만 지던 한국은 4개월 뒤인 8월 연이어 사망자가 발생하자 태도가 급격히 바뀌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정부와 의료진은 공황에 빠졌고 신종플루 백신, 타미플루 등의 부작용 의혹이 연일 언론에 보도돼 국민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다행히 11월 말 정점을 찍은 뒤 감염환자가 줄어들었고, 올해 4월 국가전염병 단계 중 평소 단계인 ‘관심’으로 복귀하며 신종플루 사태는 일단락됐다.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2004년부터 새로운 인플루엔자 발생을 예측·경고했으며 신종플루 사태 이후 백신 제작과 사태 해결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를 만나 신종플루 1년의 교훈과 재등장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계절 인플루엔자로 자리 잡은 신종플루
“지난해 8월 15일이 일요일이었는데 갑자기 기자들 전화가 쇄도하고 3사 뉴스에 제 인터뷰가 나갔어요. ‘이렇게 일을 치러야 사람들이 실감하는구나’ 싶어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종플루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시엔 붙잡을 수 없는 ‘망나니’였다면, 이젠 길들어 조금 얌전해졌을 뿐이죠.”
김 교수는 “신종플루 대유행은 종료됐지만 계절 인플루엔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올겨울에도 파괴력은 약하겠지만 신종플루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계절 인플루엔자처럼 겨울철에 오는데 다른 계절 인플루엔자보다 독하고 청·장년층의 감염률, 치사율이 높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실제 WHO의 발표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6일 ‘타임즈 오브 인디아’는 “8월 2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 동안 인도에서 942명이 신종플루 확진 판정을 받았으며 그중 83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신종플루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일까?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 2004년부터 정부의 ‘팬데믹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종플루의 출현과 대유행을 경고했는데.
“아무리 경고를 해도 반응이 없어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인구 대비 20% 확보하고, 격리병동을 확충하는 등 초기에 냉정하게 대응했다면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 당시 신종플루 백신, 타미플루 등과 관련된 ‘괴담’이 많았다.
“100% 안전한 백신, 처방약은 없다. 신종플루 백신이나 타미플루도 부작용 의혹이 많았지만 결국 입증되지는 않았다. 부작용 의혹이 있더라도 타미플루를 안 먹는 것보다 먹는 게 더 안전했다. 언론에서 타미플루의 부작용에 대해 다루니까 확진 판정을 받고도 약을 먹지 않거나 투약 시기를 놓쳐 사망에 이른 사람들도 있었다. 탤런트 이광기 씨의 아들이 그 경우다. 그 사건이 알려져 타미플루 부작용 논란은 불식됐으나 어린 생명을 잃어 안타까웠다.”
▼ 정부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다. 후속 대응은 어땠나?
“대비는 잘 못해도 사건이 터지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게 우리 국민성 아닌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 정도로 막아낸 것 보면 참 대단하다. 첫 사망자 발생 당시 국내에는 신종플루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250만 명분밖에 없었고 병원에서는 초기 진단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는 격리병동도 부족해 신종플루 의심환자와 백신 접종 희망자들이 병원 앞 천막, 비닐 텐트에서 대기하거나 진료를 받기도 했다. 확진 판정을 받는 데 진료비도 많이 들고 5일 가까이 걸려 불안감이 많았다. 하지만 정부는 서둘러 1000여 명분의 신종플루 백신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고, 병원은 타미플루를 적극적으로 처방했다. 백신 접종에도 적극 참여해 백신 투여 대상 중 67%가 접종을 완료했다. WHO에서 ‘한국의 백신 접종률은 칭찬할 만한 수준’이라고 했을 정도다.”
건강한 성인은 보건소에서 무료 접종
결국 국내 신종플루 확진환자는 75만 명, 사망자 252명, 치사율 0.017%로 미흡한 대비에 비하면 선진국 수준으로 선방했다. 그는 “마침 2009년 7월 녹십자의 화순 공장이 완공돼 백신을 자체 제작할 수 있었고, 유행이 바이러스가 더디게 퍼지는 여름철에 본격화돼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만약 공장이 지어지기 전에 신종플루가 왔다면 치사율은 훨씬 높아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섬뜩했다.
▼ 겨울에 올 신종플루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백신을 접종하면 3주일 내 항체가 생겨 건강한 사람의 경우 80% 이상 신종플루 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백신을 접종하면 건강한 사람은 1년, 면역 약한 사람도 6개월은 면역력이 지속된다. 자신이 건강해야 가족, 동료, 학교 친구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므로 모두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반드시 백신을 맞아야 한다. 10월부터 신종플루와 독감 주사가 합쳐진 혼합계절백신 1700만 명분이 시판될 예정이다. 어린이, 노약자 등 고위험군은 꼭 맞아야 한다.”
▼ 지난해 제작한 백신 700만 명분이 남아 예산낭비 비판도 받았는데.
“지나친 대비란 없다. 백신이 부족한 것은 문제지만 남는 건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백신을 다량 생산해 시효인 1년이 지나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남은 백신을 활용할 수도 있다. 9월부터 질병관리본부가 보건소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남은 신종플루 백신을 무료 접종해준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굳이 혼합계절백신을 맞기보다 신종플루 백신을 맞는 것도 괜찮다.”
▼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신종플루 사태를 통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정부는 신종플루 사태 이후 항바이러스제를 항시 인구 대비 20% 수준으로 비축하겠다고 밝혔고, 보건복지부는 지난해처럼 병원에서 천막을 치고 진료하는 상황이 없도록 100여 개 병원에 격리 진료시설 건립을 위한 예산 집행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각 병원도 지난해 백신 부작용 의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올해는 백신 접종 대상자들이 병원 내 대강당에서 따뜻하게 수분을 섭취하며 백신을 맞을 수 있게 할 것이다.” ㅁ
▼ 기술적인 변화는 없었나?
“현재까지 인플루엔자 백신은 대부분 청정란(무균 달걀)을 배양해 만들어 6개월가량 걸렸다. 지난해에도 4월 처음 신종플루가 발생했지만 백신이 나온 건 10월로 늦어 초기 대응이 아쉬웠다. 현재 다국적 백신회사들은 달걀이 아니라 세포에 바이러스를 배양해 백신을 만드는 세포배양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럼 2~3개월이면 백신이 생산되고 더욱 빠른 대응을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녹십자에는 달걀배양백신 기술밖에 없다. 어서 세포배양백신으로 기술 이전을 해서 대응해야 한다.”
▼ 국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지난해 손 세정제가 재고가 없을 정도로 인기였는데 이젠 다 잊은 것 같다. 지난해 배운 내용을 잊지 말고 실천해 바이러스를 막아야 한다. 신종플루는 갔지만, 새로운 바이러스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