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부족으로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태백 국민안전체험 테마파크.
강원도 태백시 장성군 석탄공사 사택아파트에서 만난 33년차 광부 남상진(56) 씨. 8월 16일 역시 아침 7시까지 탄광에서 근무하고 온 그는 ‘국민안전체험 테마파크 조성공사’ 글자판을 가리키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오후 3시, 한창 일할 시간인데도 현장을 오가는 차나 일꾼은 거의 없었다. 남씨는 “공사가 진행이 안 되니까 막일꾼도 잘 안 뽑는다. 일꾼으로 들어가려 해도 경쟁률이 100대 1도 넘어 시의원 ‘빽’이 필요할 정도”라고 말했다.
태백이 추진 중인 국민안전체험 테마파크(이하 안전테마파크)는 국내 최초의 ‘안전’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로 지진, 풍수해, 눈피해 등 재난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시설과 소방안전학교 등이 세워질 예정이다. 시공 당시 태백시는 “시민들이 안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동시에 레저 체험도 하고, 쉴 수도 있는 곳”이라며 “완공되면 지역주민을 위한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되고, 태백시는 ‘안전 문화의 메카’ ‘관광·휴양·레저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안전테마파크 내년 말 완공 어떻게?
올해 준공 예정이지만 현재까지 공정률은 69%. 지반 작업은 끝났으나 골조 공사는 아직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다. 현재 예상 예산은 1719억 원. 그 중 135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현 목표대로 내년 하반기에 완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업추진비였던 태백·삼척·영월·정선 등 강원도 폐광지역 4개 시·군의 탄광지역개발사업비(이하 탄개비)의 지원이 내년부터 중단되기 때문이다. 탄개비는 1999년 정부가 폐광지역 주민들과 약속한 예산으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모두 7112억 원이 지원됐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지원이 끝나 해당 기금으로 추진했던 안전테마파크 건설사업도 차질을 빚게 됐다.
안전테마파크가 내년 말 완공되려면 추가적으로 필요한 예산이 365억 원. 그러나 돈줄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는 “추가 지원은 없다”고 말한다. 민주당 최종원 의원실(강원도 태백·정선·영월·평창) 박호영 보좌관은 “지식경제부는 자치단체와 협의해서 예산을 지원하려 하나, 기획재정부가 안전테마파크 건설을 ‘문제가 있는 사업’으로 분류해 추가 예산 확보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는 2001년부터 10년간 이미 예산을 지원했고 태백시와 강원도의 ‘비축탄 판매기금’ 등 폐광기금으로도 충분히 완공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재정자립도가 27%에 불과한 태백시는 강원도와 정부의 결단을 목을 빼고 기다린다. 태백시는 “강원도가 보유하고 있는 비축탄 판매기금으로 지방비를 부담해 그에 상당한 국비를 지원받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원도 역시 추가 지원은 부담스럽다. 이광재 도지사가 현재 직무 정지 상태고, MB정부 들어 4대강 정비 관련 사업 외 신규사업에 대한 추가 지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 많은 예산을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폐광기금은 강원도 내 모든 시·군을 위한 예산이므로 그중 상당수를 태백시 안전테마파크에만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안전테마파크가 완공된다 해도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도 추가 지원을 주저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태백지역 시민단체 관계자 A씨는 “누가 태백 산골짜기까지 와서 안전 체험을 하겠나. 계획부터 문제가 있는 사업”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안전테마파크는 아직 운영 주체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태백시는 “태백시 재정여건이 원활하지 않고 이 시설은 국민안전 교육용이기 때문에 정부 주도 운영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운영권 이양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A씨는 “운영해봤자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고, 아직 누가 운영할지도 모르는 사업에 강원도, 태백시, 정부 중 누가 예산을 내놓겠느냐”고 말했다.
강원도와 태백시는 이미 무리한 리조트 사업으로 상당한 빚을 떠안고 있다. 강원도가 2004년 “세계 최고 수준의 꿈의 리조트를 짓겠다”며 착공한 알펜시아 리조트는 2009년까지 강원도개발공사에 1조488억 원의 빚만 안겨줬다. 진보신당 강원도당 길기수 위원장은 6월 “알펜시아 리조트가 100% 분양돼도 2800억 원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태백시가 대주주로 있는 오투 리조트 역시 운영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이번 겨울 시즌 영업 여부도 불투명하다. 태백시는 “오투 리조트 매각 때까지 운영자금 300억 원이 필요하다”며 강원랜드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길 위원장은 “무분별하게 리조트 사업에 거액을 투자하던 강원도와 태백시가 정작 필요한 시설엔 투자를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예산 지원 중단 땐 도시 파산”
이와 같은 열악한 재정상황 때문에 태백시 내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것은 안전테마파크뿐이 아니다. 식수난 재발을 막기 위해 올해부터 2014년까지 추진하기로 한 노후관 교체 등 상수도관망 최적 관리시스템 구축사업은 시비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있고 2013년까지 152억 원을 들여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등 체육시설을 설치하기로 한 사업 역시 언제 착공될지 미지수다.
몇몇 지역주민은 작금의 사태를 제17대 태백·정선·영월·평창 국회의원이었던 이광재 현 강원도지사의 탓으로 돌렸다. 이 도지사가 의원 임기 하반기 대부분을 ‘박연차 게이트’에 휘말려 지역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것. 또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시민은 “현재 강원도 도지사, 지역 국회의원이 야당이어서 정부가 지원을 안 해주는 것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다.
태백의 인구가 점차 줄고 있는 현실도 태백시 재정에 악재다. 2009년 정부 조사에 따르면 태백시 인구는 5만730여 명. 지방자치법상 인구 합이 5만 명 이상이면 ‘시’, 이하면 ‘군’이므로 지금 추세라면 몇 년 안에 태백‘군’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예산이 더욱 줄어 재정난이 더 깊어질 것은 뻔하다.
태백 주민들은 저마다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태백기계공고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시민은 “여기서 장사한 지 10년 됐는데 그동안 학생 수가 절반은 줄었다. 장사가 안 돼 죽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한국산재노동자협회 강원지역본부 김흥교 사무국장은 “전에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 중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대부분 집에서 놀거나 진폐증 등에 시달려 치료받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암울한 태백의 현실을 토로했다.
“정부는 폐광지역 예산을 줄 만큼 줬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예산은 망가진 환경을 다듬는 데 썼다. 이제 새로운 산업시설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서 예산을 중단하면 태백 지역은 회생 불가능하다. 광산뿐 아니라 도시 자체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태백시가 600억 원에 가까운 시 예산을 투자한 오투 리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