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감독의 현역 시절과 류현진이 활약하는 현 시대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건 사실 무리다. 상대하는 타자의 실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현진의 현 성적이나 구위를 볼 때, 선 감독은 물론이고 역대 한국 프로야구를 휘저었던 명투수들의 기록과 견주어서 결코 모자라지 않다. 더구나 그는 이제 프로 5년차, 스물세 살에 불과하다. ‘괴물’로 불리는 한화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넘어 야구 역사를 바꿀 명투수로 떠오르고 있다.
8월 3일 류현진은 목동 넥센전에 선발 등판해 8이닝 동안 단 1실점으로 승리를 거뒀다. 시즌 14승째(4패). 다승·방어율·탈삼진에서 1위에 랭크, 신인이던 2006년에 이어 생애 두 번째 트리플크라운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올 시즌 21경기에 선발 등판해 모두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투구·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지난해에도 8월 19일 대전 삼성전부터 9월 17일 잠실 두산전까지 6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선발 등판 경기에서는 27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행진. 지난해 마지막 경기이자 팀 선배 송진우의 은퇴 경기였던 9월 23일 대전 LG전에서는 1회 무사 1루에서 마운드에 올라 8.1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선발 등판이 아닌 탓에 제외됐다.
27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행진
순수하게 ‘연속경기’로 집계한 류현진의 퀄리티스타트 기록은 현재까지 21경기다. 이 기록만으로도 이미 역대 최고. 스포츠통계 전문회사 ‘스포츠투아이’에 전산화된 데이터(1988년 이후)와 작업 진행 중인 데이터(1982~1986년)를 근거로 한 집계에 따르면, 기존 연속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은 조계현(1995년 4월 25일~9월 26일)과 권명철(1995년 5월 19일~8월 27일 DH 2차전)의 17경기가 최다였다. 그 다음은 손민한의 16경기(2007년 9월 13일~2008년 6월 13일)와 김상엽의 15경기(1995년 6월 16일~9월 10일)다.
연승 기록보다 어려운 게 연속 퀄리티스타트일 수도 있다. 타선이나 수비 같은 변수가 최대한 배제된, 순수한 투수의 능력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정민태가 보유한 선발 최다 연승 기록(21연승)만 살펴봐도 그렇다. 이 중에는 자책점이 3점을 초과하고도 승리 투수가 된 게임이 5경기 포함됐다. 물론 연승 기간에 퀄리티스타트를 못 하고도 패전을 면한 경기도 있었다. 류현진의 기록이 더욱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류현진 역시 “다른 기록보다도 퀄리티스타트는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의 퀄리티스타트는 다른 선수들과 내용 자체가 다르다. 27번의 연속 퀄리티스타트 중 6이닝만 채운 경기는 3번뿐이다. 8이닝 이상 투구가 16번이었고, 그중 5번이 완투다. 자책점 3점을 기록한 경기는 4번에 불과하다. 나머지 23번은 물론 2자책점 이하다. 류현진의 기록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다양한 구종에 제구력 겸비
8월 4일 현재 14승, 방어율 1.59, 탈삼진 158개를 기록 중인 류현진은 생애 2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닌 두 종류다. 같은 서클체인지업을 던지더라도 볼카운트를 잡을 때와 삼진을 잡을 때 그립부터 다르다. “이 정도면 칠 수 있겠다고 기다리면 결정적인 순간, 다른 볼이 들어온다”는 게 타자들의 반응이다. 류현진이 직접 밝힌 비결은 검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슬라이더를 던지듯 검지에 살짝 힘을 줘서 공을 놓는데, 이 공이 바로 대각선으로 뚝 떨어지는 ‘두 번째’ 체인지업이다.
괴물의 또 다른 힘은 진화한다는 데 있다. 슬라이더 장착 속도도 여느 투수보다 빠르다. 대개 투수가 실전에서 던질 수 있는 구종을 손에 익히기까지 만 2년이 걸린다고 본다. 하지만 류현진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슬라이더라는 무기를 또 다른 레퍼토리로 구사하고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2개, 3개를 응용한다”는 평가는 그의 최대 장점이다. 또한 지난해보다 팔을 앞으로 더 끌고 나오면서 직구 속도는 늘고 볼 끝은 묵직해졌다.
류현진의 진정한 강점은 마운드에서의 안정감이다. 평소에는 소년 같지만 마운드에 오르면 ‘능구렁이 같다’는 말처럼 여유가 넘친다. “류현진은 절대 노히트노런을 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류현진은 마운드에 오를 때 타자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팀이 큰 폭의 리드를 하거나 노아웃일 때 속된 말로 ‘설렁설렁’ 타자를 상대한다. 그러나 누상에 주자가 나가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그가 전력투구할 때 그의 볼을 때릴 수 있는 타자는 8개 구단에서 몇 명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노히트노런을 하지 못할 것’이란 말은 그의 장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경기에서 130개를 던지고도 “더 던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더욱이 그는 마운드에서 창의력이 넘치는 투수다. 단순히 포수의 리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깜짝 놀랄 투구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7월 21일 대전 롯데전. 9회 초 1사 1·3루 위기에서 상대 간판 홍성흔-이대호와 맞서면서 8개의 공을 모두 직구로만 던졌다. 홍성흔은 2루 플라이 아웃, 이대호는 삼진으로 잡고 결국 1대 0 완봉승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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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의 전지훈련에 참가한 박찬호가 류현진에게 구질을 설명하고 있다.
박찬호는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1990년대 중후반, 다저스 소속 때 마이너리그와 콜로라도 원정 경기 두 차례에 걸쳐 직구 구속 161km를 찍은 적이 있다. 그 시절 직구 평균 구속은 151km였다. 빼어난 광속구와 더불어 박찬호의 또 다른 ‘킬러 콘텐츠’는 슬러브였다. 낙폭이 큰 커브와 상대적으로 속도가 빠른 슬라이더의 장점만을 합한 슬러브는 박찬호의 히트 상품이었다. 구속은 140km에 조금 못 미쳤지만 특히 왼손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몸 쪽으로 꽉 찬 듯하게 날아가다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박찬호가 ‘마지막 전성기’로 볼 수 있는 2000년과 2001년에 각각 탈삼진 217개(리그 2위), 218개(3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명품 직구에 슬러브의 위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직구 평균 구속이 145km에 ‘불과’한 류현진은 박찬호에 비해 확실히 약점이 있다. 그러나 류현진에겐 서클체인지업이란 필살기가 있다. 박찬호도 타자들과의 타이밍 싸움을 위해 체인지업을 던지긴 했지만 예리한 맛은 류현진에 못 미친다. 류현진이 박찬호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완급조절. 직구 구속이 떨어지지만 다양한 변화구와 제구력을 바탕으로 상대와의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류현진과 김광현 둘 중 하나면 ‘류현진’
류현진이 미국에 진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빅리거 출신인 KIA 투수 서재응은 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한다. “류현진은 국내 수준을 뛰어넘었다. 메이저리그에 당장 간다고 해도 15승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서재응은 “그런 체인지업에 제구력이면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본다. 강약 조절에도 능하고, 완투 능력까지 갖췄다. 어느 팀에 가더라도 3선발 안에는 들 것”이라고 했다.
빅리그 사령탑을 거친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 역시 “류현진이 최상의 컨디션에서 볼을 던진다면 메이저리그 타자도 쉽게 공략하기 힘들 것이다. 류현진은 무기가 많은 선수”라고 평가했다. 물론 새로운 환경 적응이란 변수가 있지만 구위 하나만 놓고 봤을 때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류현진은 2012년 시즌이 끝나면 해외진출 자격이 부여되는 7년 프리에이전트(FA)가 된다.
야구계에선 류현진에 필적할 만한 동시대의 투수로 SK 김광현을 꼽는다. 김광현도 류현진처럼 빼어난 직구를 갖고 있다. 류현진에게 체인지업이 대표 무기라면 김광현의 주무기는 슬라이더다. 류현진이 직구와 체인지업을 던질 때와 마찬가지로 김광현 또한 직구와 슬라이더가 동일한 팔 스윙에서 나온다. 구속 차이 역시 10km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존은 하나다. 김광현은 류현진보다 마운드에서 공격적이다. 류현진이 포커페이스를 바탕으로 수 싸움에서 타자를 압도한다면, 김광현은 대를 쪼갤 듯한 패기를 앞세워 힘으로 타자를 압도한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자신의 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정에서 나타난다. 숨기지 못하는, 솔직담백함이 있지만 ‘투수의 자질’로 봤을 때 현재까지 김광현은 류현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지난 4월 ‘스포츠동아’는 8개 구단 주요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류현진과 김광현, 둘 중 누가 센가’라는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삼성 양준혁은 “광현이는 좋을 때 정말 좋다. 컨디션이 좋은 날 딱 한 번만 붙는다면 광현이가 이길 것 같다. 그러나 계속 길게 붙으면 현진이가 이길 확률이 높다”고 했다. 김광현 역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투수지만 현 실력만 놓고 봐서는 차이가 있다. 넥센 정민태 투수코치는 ‘어느 투수가 탐이 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답했다.
“둘 중 하나만 데려온다면 류현진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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