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가을, 보리출판사에서 ‘58년 개띠’라는 첫 시집을 내고 학교와 시민사회단체에 숱하게 불려다녔습니다. 시집을 낸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학생과 청년이 많이 구입해 읽는다고 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아직도 58년 개띠를 주목하는 걸까요?
가난을 짊어지고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오직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경제성장’만을 내다보고 부지런히 살아온 덕에 나라 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세웠다고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부지런히 살았는데 식량 가운데 75%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고요? 온갖 오염된 수입 농산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토피와 천식, 성인병 따위에 걸려 고통받고,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을 꿈꾸게 만들었다고요? 그렇게 기계처럼 악착같이 살았는데 벌써 명예퇴직 바람이 덮쳐 마음 둘 곳이 없다고요? 58년 개띠,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습니다. 말이 좋아 ‘마산시’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산골마을이었지요. 우리 형제는 아들 셋, 딸 셋인데 나는 둘째 아들이고 다섯 번째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난했지만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 많은 나날을 술로 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약해빠졌는지 곰곰이 뒤돌아보니, 마음속 깊이 박힌 외로움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것도 겨우 졸업하고, 마산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인 ‘유공사’에 취직했습니다. 동무들이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서 깔끔한 교복을 입고 멋진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나는 공장에서 기름때 전 장갑을 끼고, 까닭도 없이 고참들한테 얻어맞으며 때론 빨래까지 대신 해주면서 기술을 익혔습니다. 학교 가는 동무들과 골목에서 마주친 날엔 하루 종일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동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빙빙 돌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동무들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날이면 문득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되지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는 분 소개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은 형과 누나도 있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나를 가장 부끄럽게 했던 것은 ‘손’입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아무리 힘껏 씻어도, 손톱 밑의 기름때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책상에 올려놓기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야간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몇 시간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습니다. 나뿐 아니라 야간학교 학생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낮에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깊은 밤이 아니면 학교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포장마차에 자주 갔습니다. 저녁밥조차 먹지 못했을 때가 많아 늘 출출했지만, 돈이 모자라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열넷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일본에서 목수로 일하다 쌓아둔 목재가 무너지는 바람에 발목을 크게 다쳤습니다. 일하다가 다쳤는데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쫓겨났습니다. 보상 한푼 받지 못한 채, 낡은 기계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아버지는 광복을 맞아 한국에 돌아와서 월영동 가난한 산동네에 터를 잡았습니다.
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이런 허드렛일조차 얻기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습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며 씻지도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 몸으로 이른 아침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일하러 나갔지요. 어머니의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거칠고 단단했으며,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양말이 없어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1974년 12월 17일 저녁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날도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만큼 추운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집에 닿자마다 몇 달째 아파 누워 계신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됐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1977년 12월 19일, 내 나이 겨우 스무 살 되던 해였습니다.
어린 자식들 먹일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 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던 어머니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울던 어머니였는데,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는데….
살아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납니다. 어머니가 물려주고 떠난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깊은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못난 내가 어찌 성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인 농부가 돼 농사지으며 시를 쓰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산골마을 작은 흙집에서 나는 오늘도 아내와 남의 논밭 빌려 농사지으면서도 헛된 부추김(돈이나 명예 따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난’만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농촌 들녘에서, 공사장에서,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에 날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온갖 필요한 물건을 다 쓸 수 있고, 이나마 깨끗한 하늘 아래 숨 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정홍 씨는 바쁘게 살면서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1992년 ‘전태일 문학상’과 2009년 ‘우리나라 좋은 동시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동시집 ‘윗몸일으키기’(현암사), ‘우리 집 밥상’(창비)과 시집 ‘58년 개띠’(보리), ‘아내에게 미안하다’(실천문학사)를 비롯해 자녀교육 이야기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보리)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세 번째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와 세 번째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을 펴냈다.
가난을 짊어지고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오직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경제성장’만을 내다보고 부지런히 살아온 덕에 나라 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세웠다고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부지런히 살았는데 식량 가운데 75%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고요? 온갖 오염된 수입 농산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토피와 천식, 성인병 따위에 걸려 고통받고,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을 꿈꾸게 만들었다고요? 그렇게 기계처럼 악착같이 살았는데 벌써 명예퇴직 바람이 덮쳐 마음 둘 곳이 없다고요? 58년 개띠,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습니다. 말이 좋아 ‘마산시’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산골마을이었지요. 우리 형제는 아들 셋, 딸 셋인데 나는 둘째 아들이고 다섯 번째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난했지만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 많은 나날을 술로 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약해빠졌는지 곰곰이 뒤돌아보니, 마음속 깊이 박힌 외로움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것도 겨우 졸업하고, 마산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인 ‘유공사’에 취직했습니다. 동무들이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서 깔끔한 교복을 입고 멋진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나는 공장에서 기름때 전 장갑을 끼고, 까닭도 없이 고참들한테 얻어맞으며 때론 빨래까지 대신 해주면서 기술을 익혔습니다. 학교 가는 동무들과 골목에서 마주친 날엔 하루 종일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동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빙빙 돌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동무들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날이면 문득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되지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는 분 소개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은 형과 누나도 있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나를 가장 부끄럽게 했던 것은 ‘손’입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아무리 힘껏 씻어도, 손톱 밑의 기름때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책상에 올려놓기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야간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몇 시간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습니다. 나뿐 아니라 야간학교 학생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낮에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깊은 밤이 아니면 학교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포장마차에 자주 갔습니다. 저녁밥조차 먹지 못했을 때가 많아 늘 출출했지만, 돈이 모자라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열넷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일본에서 목수로 일하다 쌓아둔 목재가 무너지는 바람에 발목을 크게 다쳤습니다. 일하다가 다쳤는데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쫓겨났습니다. 보상 한푼 받지 못한 채, 낡은 기계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아버지는 광복을 맞아 한국에 돌아와서 월영동 가난한 산동네에 터를 잡았습니다.
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이런 허드렛일조차 얻기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습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며 씻지도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 몸으로 이른 아침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일하러 나갔지요. 어머니의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거칠고 단단했으며,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양말이 없어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1974년 12월 17일 저녁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날도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만큼 추운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집에 닿자마다 몇 달째 아파 누워 계신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됐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1977년 12월 19일, 내 나이 겨우 스무 살 되던 해였습니다.
어린 자식들 먹일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 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던 어머니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울던 어머니였는데,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는데….
살아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납니다. 어머니가 물려주고 떠난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깊은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못난 내가 어찌 성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인 농부가 돼 농사지으며 시를 쓰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산골마을 작은 흙집에서 나는 오늘도 아내와 남의 논밭 빌려 농사지으면서도 헛된 부추김(돈이나 명예 따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난’만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농촌 들녘에서, 공사장에서,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에 날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온갖 필요한 물건을 다 쓸 수 있고, 이나마 깨끗한 하늘 아래 숨 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정홍 씨는 바쁘게 살면서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1992년 ‘전태일 문학상’과 2009년 ‘우리나라 좋은 동시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동시집 ‘윗몸일으키기’(현암사), ‘우리 집 밥상’(창비)과 시집 ‘58년 개띠’(보리), ‘아내에게 미안하다’(실천문학사)를 비롯해 자녀교육 이야기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보리)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세 번째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와 세 번째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