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진동, 충격 등 다양한 원인이 금속의 ‘피로’를 가져와 결국 파열 될 수 있다는 ‘피로파괴’ 개념은 열차에서 유래했다. 사진은 1976년 6월 충남 천안시 용곡동 풍세건널목에서 화차 연결핀이 빠지면서 탈선 전복된 화물열차.
공학과 의학 분야 두 전문용어가 지칭하는 이런 현상은 언뜻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시각에서 추적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 흥미롭다. 사람들이 피로파괴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 및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게 된 배경과 계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특히 산업혁명의 상징으로서 19세기 전반 영국을 필두로 서유럽 여러 나라에 등장한 철도가 그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해 19세기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 확대된 산업혁명은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등장, 수공업 작업장 대신 기계화된 공장제 생산의 출현에서 보듯 새로운 에너지원의 이용과 생산기술의 혁신을 의미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의미는 단순히 생산이나 경제 영역의 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산업혁명은 19세기 산업사회 출현의 계기가 된 것으로,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방식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심층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이 갖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변화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철도다. 증기기관차가 끄는 열차가 등장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화물과 여객의 대량수송을 가능하게 한 운송혁명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을 넘어 인식 및 관념에서의 변화도 포함했다. 예컨대 철도의 출현은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소멸을 뜻했다. 즉, 지금까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던 시간은 철도가 나타나면서 하나로 통일됐다. 또 개별적·독립적인 의미를 지녔던 각 지방은 철도로 연결되면서 철도망의 일부로 종속됐으며, 특히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의 나머지 공간은 의미를 잃었다.
충격 완화 ‘쿠션 문화’ 거실까지 진출
철도가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은 19세기가 경과하면서 가구, 건축 등을 통해 일상에 뿌리내리는 ‘쿠션 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철도여행이 일반화하면서 사람들은 열차 운행에 동반된 소음이나 진동이 승객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에 따라 진동으로 인한 피로와 긴장을 줄이고자 차량에 스프링 장치를 달고 깃털로 채운 좌석을 설치하는 등 충격을 흡수·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열차를 작동시키는 기계장치의 역학적 움직임에서 승객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탄력성 있는 물질을 사용한 게 쿠션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도에서 유래한 쿠션은 시간이 흐를수록 완충작용이라는 산업적 기원과 기능성에서 탈피해 독립하게 된다. 즉 기계적 진동이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충격 완화가 필요 없는 거실의 가구에도 쿠션이 설치됐다.
피로파괴에 대한 관심 역시 쿠션과 마찬가지로 철도여행의 병리학적 배경에서 출발했다. 철도여행이 승객뿐 아니라 승객을 실어 나르는 기계장치의 재료도 피로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피로파괴 개념을 낳은 것이다. 피로의 개념이 생리학적 의미와 더불어 기술적 의미를 획득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다. 예컨대 1854년 런던의 한 토목공학 연구소는 되풀이되는 ‘부하, 타격, 진동, 충격, 긴장’ 같은 다양한 원인이 ‘금속의 피로’를 가져오고 그 결과 금속이 파열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4월 7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천안함 생존자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병들. 전문가들은 이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위험이 높다고 지적한다.
피로파괴와 마찬가지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개념도 열차사고에서 유래했다. 1829년 영국의 한 승객은 열차여행을 ‘비행’에 비유하며 ‘한 작은 사고에 모두가 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을 피력했다. 초기의 두려움은 일상화되는 철도여행에 적응하면서 안정감으로 대체됐지만, 잠재한 공포는 열차사고를 통해 갑작스럽게 억제와 망각의 상태에서 귀환했다. 충돌, 탈선 등 사전경고 없이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주는 공포감이야말로 다른 종류의 사고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열차사고의 특징이었다. 공포감이라는 열차사고의 특징은 특히 피해자가 외관상 전혀 부상하지 않았는데도 심한 불안감, 정신적 장애, 강박행위를 보이는 현상에서 두드러졌다.
열차사고가 초래한 쇼크 증세는 일찍부터 알려졌으나 의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대상이 된 것은 1860년대 철도사고에 대한 손해배상 의무가 법적으로 제정된 이후였다. 철도사고 손해배상 소송에서 의학 전문가들은 소송 청구인의 증세가 실제 피해증상인지, 배상을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인지 판별해야 했던 것이다. 사고 피해자의 쇼크 증세가 꾀병이 아니라 판명할 경우, 전문가들은 한동안 ‘철도척수(Railway Spine)’,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척수의 미세한 손상을 근거로 들었다. 이러한 설명은 모든 질병을 병리학적 관점에서 보려는 정통 의학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자, 신체 손상만을 배상 근거로 인정하는 법률적 도그마를 반영한 것이었다.
열차사고 피해자들 심한 불안감
그러나 척수조직의 병리학적 변화가 실제 입증되지 못하자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운 척수 손상이라는 설명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1870년대에는 정신병리학적 설명이 새로이 등장해 순수 병리학적 설명과 혼합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덴마크 출신의 영국 외과의 에릭센이 바로 그 경우였다. 그는 1875년 ‘철도와 신경계의 손상’에 관한 자신의 저술 개정판을 내면서 10여 년 전 초판과는 달리 불안감, 두통, 소화불량, 건망증, 말더듬, 성욕감퇴, 발한, 악몽 등 열차사고 피해자들의 쇼크 증세가 공포의 경험에 따른 정신적 외상 증상임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1880년대에는 열차사고에 따른 정신적 외상의 설명에서 심리적 충격 외 물리적 충격은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 척수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대신 ‘철도 뇌(Railway Brain)’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특히 1880년대 말 독일의 신경과 의사 오펜하임은 열차사고에 따른 쇼크를 대뇌 피질에서 일어나는 뇌수기능장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정신외상성 신경증’으로 명명했다. 자율신경 및 감각기능의 이상증세를 모두 포함한 이 의학용어는 이후 ‘공포신경증’ ‘히스테리성 신경증’,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쟁신경증’ 등 유사한 용어와 경쟁하며 통용됐다. 철도라는 산업사회의 기술적 실체가 정신적 외상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극복하고 의학의 전통적 견해를 바꿔놓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