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로, 남은 사건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위원회) 이영조(55) 위원장의 취임 일성은 과거사 조사 시 좌우 모두를 다룸으로써 그동안 제기됐던 이념 편향 문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반민주·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기 위해 2005년 12월 설립됐다. 현재 위원회는 올해 말 활동 종료를 앞두고 진실 규명을 위한 막바지 조사 작업에 한창이다.
과거사 조사에 이념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위원회에도 선례라는 것이 있다. 진실 규명도 결국 증거에 입각해 이뤄진다. 위원 간 개인적 신념은 다를 수 있지만,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쳐 의결된다. 위원 개인의 이념 성향이 위원회의 결정을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문 책자의 배포 중단을 두고 좌파 흔적 지우기 논란에 휩싸였다.
“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유일한 영문 책자였다. 해외에 내보이는 위원회의 얼굴인데 문법, 구문상의 오류,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전임 위원장이 쓴 부분은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고 감수를 거쳐서인지 비교적 괜찮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엉망이었다. 이미 위원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번역한 것인데, 새삼스레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겠는가?”
조사연구비 삭감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일부 인터넷 언론의 말처럼 무조건 삭감한 것이 아니다. 같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전문위원들의 수당을 조정하려면 근로기준법상 상대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놓쳐서 원래 수준으로 복구시켰다.”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해외동포사에 대한 조사를 총괄했다.
“해외동포사를 연구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많은 한국인이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사실이 결코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으며, 자립할 수 있는 힘도 갖게 됐다. 물론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분들 처지에서는 큰 아픔이었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해다.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에 대한 성과는.
“우리는 6·25전쟁 기간에 많은 양민이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거시적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를 통해 어떻게 인민재판을 받았고, 퇴각 과정에서 누구의 지령을 받아 양민학살이 일어났는지, 그 책임자는 누구였는지 등에 대한 미시적 진실을 밝히는 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위원회 활동이 올해로 끝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의 과거사 정리를 평가하면.
“한국의 위원회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실 규명을 위한 문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진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중남미 국가들의 과거사 위원회는 증거가 부족해 주로 증언에 의존하다 보니 진실 규명에 어려움이 많다. 비록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더라도 규명되지 않은 진실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과거사 연구재단이 발족되거나 학자들의 연구과정을 통해 밝혀지리라 본다.”
앞으로의 계획은.
“위원회에 신청된 사건은 다 마무리하고 싶다. 현재 20% 정도 남았는데, 조사관들 스스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만큼 충분히 완수해내리라 믿는다. 위원회 활동과정에서 발굴한 유해가 많다. 지금 충북대 박물관에 임시 안치돼 있는데, 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도 노력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위원회) 이영조(55) 위원장의 취임 일성은 과거사 조사 시 좌우 모두를 다룸으로써 그동안 제기됐던 이념 편향 문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반민주·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기 위해 2005년 12월 설립됐다. 현재 위원회는 올해 말 활동 종료를 앞두고 진실 규명을 위한 막바지 조사 작업에 한창이다.
과거사 조사에 이념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위원회에도 선례라는 것이 있다. 진실 규명도 결국 증거에 입각해 이뤄진다. 위원 간 개인적 신념은 다를 수 있지만,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쳐 의결된다. 위원 개인의 이념 성향이 위원회의 결정을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문 책자의 배포 중단을 두고 좌파 흔적 지우기 논란에 휩싸였다.
“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유일한 영문 책자였다. 해외에 내보이는 위원회의 얼굴인데 문법, 구문상의 오류,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전임 위원장이 쓴 부분은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고 감수를 거쳐서인지 비교적 괜찮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엉망이었다. 이미 위원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번역한 것인데, 새삼스레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겠는가?”
조사연구비 삭감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일부 인터넷 언론의 말처럼 무조건 삭감한 것이 아니다. 같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전문위원들의 수당을 조정하려면 근로기준법상 상대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놓쳐서 원래 수준으로 복구시켰다.”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해외동포사에 대한 조사를 총괄했다.
“해외동포사를 연구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많은 한국인이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사실이 결코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으며, 자립할 수 있는 힘도 갖게 됐다. 물론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분들 처지에서는 큰 아픔이었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해다.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에 대한 성과는.
“우리는 6·25전쟁 기간에 많은 양민이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거시적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를 통해 어떻게 인민재판을 받았고, 퇴각 과정에서 누구의 지령을 받아 양민학살이 일어났는지, 그 책임자는 누구였는지 등에 대한 미시적 진실을 밝히는 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위원회 활동이 올해로 끝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의 과거사 정리를 평가하면.
“한국의 위원회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실 규명을 위한 문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진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중남미 국가들의 과거사 위원회는 증거가 부족해 주로 증언에 의존하다 보니 진실 규명에 어려움이 많다. 비록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더라도 규명되지 않은 진실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과거사 연구재단이 발족되거나 학자들의 연구과정을 통해 밝혀지리라 본다.”
앞으로의 계획은.
“위원회에 신청된 사건은 다 마무리하고 싶다. 현재 20% 정도 남았는데, 조사관들 스스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만큼 충분히 완수해내리라 믿는다. 위원회 활동과정에서 발굴한 유해가 많다. 지금 충북대 박물관에 임시 안치돼 있는데, 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도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