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공연을 문제 삼지 않은 이유
편집이란 위대한 것이다. 누군가 열 문장의 말을 했다고 치자. 그 안에는 맥락과 흐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중 주제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만 뚝 잘라서 편집한다면? 진의와 맥락과 흐름은 사라지고, 또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편집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지난해 12월, 가수 G-드래곤(그룹 ‘빅뱅’의 멤버·본명 권지용)의 콘서트에서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연출이 있었다 하여 논란이 됐다. 심지어 G-드래곤은 아이돌 사상 초유로 공연 내용 때문에 검찰 조사(2월4일)까지 받았다. 맥락과 의미와 상관없는, 편집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묻고 싶다. 과연 그 장면을 비난하는 이들은 공연 전체를 보았는가? 긴 공연시간 중 1분 남짓한 퍼포먼스만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 아닌가.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에는 사람들의 클릭 수만이 지상 명제가 됐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G-드래곤 콘서트의 그 퍼포먼스만 뚝 잘라서 다뤄진 것도 그래서다. 후속 보도도 공연의 선정성만 확대 재생산한다. 아무도 그 퍼포먼스가 왜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G-드래곤의 첫 콘서트 주제가 ‘소년에서 어른으로’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잊혔다. 그 퍼포먼스는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연출의 일환이었다.
대중문화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1980년대 팝계를 호령한 프린스는 자신의 콘서트장에 침대를 놓고 그 위에서 홀로 섹스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쳐 논란이 됐다. 마돈나? 그녀의 80년대란 성 담론의 역사였다. 속옷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그녀는 수녀의 타락을 암시하는 뮤직 비디오를 찍어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표현의 영역을 넓힌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건 그만큼 이들의 행동을 해석해 의미를 부여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여론이 비평의 자리를 인정해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G-드래곤을 둘러싼 논란의 자리에는? 없다. 공연의 흐름에서 퍼포먼스가 어떤 맥락인지 그것이 적절했는지, 나아가 그 퍼포먼스가 대중예술에서 미적으로 평가받을 만한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논란과 가십은 있되 분석과 담론은 없다. 그것이 G-드래곤 해프닝의 첫 번째 비극이다.
또 하나의 비극은 그 논란이 검찰까지 갔다는 사실이다. 공권력 개입을 주장하는 측은 ‘청소년에게 미치는 유해성’을 근거로 들었다. 다시 묻고 싶다. 그 유해성을 법이 입증할 수 있는가? 외국의 사례를 보자. 역시 1980년대 미국이다. 한 청소년이 자살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이 어느 헤비메탈 음악 때문에 자살했다고 그 밴드를 고소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특정한 음악이 듣는 이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함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게 무죄판결의 이유였다. 문화적 표현은 논쟁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법이 판단할 대상은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외국에서 이미 끝난 논쟁을 두고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꼴이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만일 G-드래곤의 콘서트 전체가 외설적인 퍼포먼스로 도배됐다면 그 자리에 있던 팬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아이돌 가수에게 스캔들이 나면 가장 먼저 흥분하는 건 팬이다. ‘나의 오빠’가 ‘다른 여자’의 점유물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심리에서다. 하지만 G-드래곤 콘서트를 본 팬들이 그 퍼포먼스를 문제 삼았는가. 그렇지 않다. 공연 전체의 맥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으로 가는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하나의 퍼포먼스임을, 굳이 표현의 자유를 들이대지 않아도 체득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즐겼다. 어떤 ‘유해한’ 피드백도 없었다. 뒤늦게 주변에서 이를 공격한다. 편집이 만들어내고 공권력이 불을 붙이는 형국이다. 비극의 완성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hanmail.net
“야동 보며 야할 대로 야해진 애들이 G-드래곤 공연 보고 충격받나?”
가수 G-드래곤의 노래에 곁들여진 춤동작이 성행위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검찰이 내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걸 보면, 정말 대한민국이 문화적으로 촌스러운 나라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는 두 번이나 ‘외설죄’에 걸려 ‘긴급 구속’까지 당하는 변을 겪었다. 그 후에 유사한 사건이 안 생길 줄로 믿었다.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이 1992년의 일이므로 벌써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젠 ‘야하다’나 ‘섹시하다’가 성적 모독 발언이 아니라 칭찬이 되었고, 모든 대중문화의 핵심 코드가 ‘섹시함’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나는 2007년 내 인터넷 홈페이지 내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불구속 입건돼 벌금형을 받았다.
도대체 나는 음란한 것(또는 외설적인 것)이 왜 비판받고 단죄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섹스만큼 즐거운 게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섹스야말로 ‘내셔널 스포츠(국민체육)’ 아닌가. ‘연애’ 빠진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사랑’ 없는 대중가요가 있을 수 있을까. 그 사랑의 밑바탕에 섹스가 없을 리 없다. 게다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G-드래곤의 퍼포먼스를 보니, 나한테는 오히려 ‘싱거운 흉내’에 불과했다.
서구에서 누드 연극이 등장한 건 프리섹스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였다. 그런데 그들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벌거벗고 하는 애무도 아닌 옷 다 입고 서툴게 흉내 내는 정도에 죄의 유무를 따지고 있다. 이럴 때 사법 당국이 만날 들고 나오는 명분은 청소년 보호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서 성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요나 문학 등을 통해서라도 청소년이 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하는 말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수구적 성도덕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내가 늘 강조해온 말이 “모르는 게 약은 아니다”이다.
이 시대의 섹스는 감춰진 게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른바 ‘야동’을 본다. 이미 야할 대로 야해진 청소년이 G-드래곤의 춤동작 하나로 성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척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고, 위선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되려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누가 뭐라고 쓰든, 뭐라고 하든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죄’로 취급하는 일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니 한국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촌스러운 나라일 수밖에 없다.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 mks0414@hanmail.net
편집이란 위대한 것이다. 누군가 열 문장의 말을 했다고 치자. 그 안에는 맥락과 흐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중 주제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만 뚝 잘라서 편집한다면? 진의와 맥락과 흐름은 사라지고, 또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편집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지난해 12월, 가수 G-드래곤(그룹 ‘빅뱅’의 멤버·본명 권지용)의 콘서트에서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연출이 있었다 하여 논란이 됐다. 심지어 G-드래곤은 아이돌 사상 초유로 공연 내용 때문에 검찰 조사(2월4일)까지 받았다. 맥락과 의미와 상관없는, 편집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묻고 싶다. 과연 그 장면을 비난하는 이들은 공연 전체를 보았는가? 긴 공연시간 중 1분 남짓한 퍼포먼스만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 아닌가.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에는 사람들의 클릭 수만이 지상 명제가 됐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G-드래곤 콘서트의 그 퍼포먼스만 뚝 잘라서 다뤄진 것도 그래서다. 후속 보도도 공연의 선정성만 확대 재생산한다. 아무도 그 퍼포먼스가 왜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G-드래곤의 첫 콘서트 주제가 ‘소년에서 어른으로’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잊혔다. 그 퍼포먼스는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연출의 일환이었다.
대중문화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1980년대 팝계를 호령한 프린스는 자신의 콘서트장에 침대를 놓고 그 위에서 홀로 섹스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쳐 논란이 됐다. 마돈나? 그녀의 80년대란 성 담론의 역사였다. 속옷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그녀는 수녀의 타락을 암시하는 뮤직 비디오를 찍어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표현의 영역을 넓힌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건 그만큼 이들의 행동을 해석해 의미를 부여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여론이 비평의 자리를 인정해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G-드래곤을 둘러싼 논란의 자리에는? 없다. 공연의 흐름에서 퍼포먼스가 어떤 맥락인지 그것이 적절했는지, 나아가 그 퍼포먼스가 대중예술에서 미적으로 평가받을 만한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논란과 가십은 있되 분석과 담론은 없다. 그것이 G-드래곤 해프닝의 첫 번째 비극이다.
또 하나의 비극은 그 논란이 검찰까지 갔다는 사실이다. 공권력 개입을 주장하는 측은 ‘청소년에게 미치는 유해성’을 근거로 들었다. 다시 묻고 싶다. 그 유해성을 법이 입증할 수 있는가? 외국의 사례를 보자. 역시 1980년대 미국이다. 한 청소년이 자살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이 어느 헤비메탈 음악 때문에 자살했다고 그 밴드를 고소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특정한 음악이 듣는 이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함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게 무죄판결의 이유였다. 문화적 표현은 논쟁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법이 판단할 대상은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외국에서 이미 끝난 논쟁을 두고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꼴이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만일 G-드래곤의 콘서트 전체가 외설적인 퍼포먼스로 도배됐다면 그 자리에 있던 팬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아이돌 가수에게 스캔들이 나면 가장 먼저 흥분하는 건 팬이다. ‘나의 오빠’가 ‘다른 여자’의 점유물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심리에서다. 하지만 G-드래곤 콘서트를 본 팬들이 그 퍼포먼스를 문제 삼았는가. 그렇지 않다. 공연 전체의 맥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으로 가는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하나의 퍼포먼스임을, 굳이 표현의 자유를 들이대지 않아도 체득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즐겼다. 어떤 ‘유해한’ 피드백도 없었다. 뒤늦게 주변에서 이를 공격한다. 편집이 만들어내고 공권력이 불을 붙이는 형국이다. 비극의 완성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hanmail.net
“야동 보며 야할 대로 야해진 애들이 G-드래곤 공연 보고 충격받나?”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연출로 검찰 조사를 받은 G-드래곤.
도대체 나는 음란한 것(또는 외설적인 것)이 왜 비판받고 단죄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섹스만큼 즐거운 게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섹스야말로 ‘내셔널 스포츠(국민체육)’ 아닌가. ‘연애’ 빠진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사랑’ 없는 대중가요가 있을 수 있을까. 그 사랑의 밑바탕에 섹스가 없을 리 없다. 게다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G-드래곤의 퍼포먼스를 보니, 나한테는 오히려 ‘싱거운 흉내’에 불과했다.
서구에서 누드 연극이 등장한 건 프리섹스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였다. 그런데 그들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벌거벗고 하는 애무도 아닌 옷 다 입고 서툴게 흉내 내는 정도에 죄의 유무를 따지고 있다. 이럴 때 사법 당국이 만날 들고 나오는 명분은 청소년 보호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서 성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요나 문학 등을 통해서라도 청소년이 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하는 말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수구적 성도덕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내가 늘 강조해온 말이 “모르는 게 약은 아니다”이다.
이 시대의 섹스는 감춰진 게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른바 ‘야동’을 본다. 이미 야할 대로 야해진 청소년이 G-드래곤의 춤동작 하나로 성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척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고, 위선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되려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누가 뭐라고 쓰든, 뭐라고 하든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죄’로 취급하는 일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니 한국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촌스러운 나라일 수밖에 없다.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 mks041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