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이태원에서 한 청년이 죽었다. 햄버거 가게의 화장실에서 칼로 9군데를 깊숙이 찔렸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 2명이 서로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면서 수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살인혐의로 기소된 에드워드 리(당시 18세)는 증거 불충분으로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고,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아더 패터슨(당시 18세)은 특사로 풀려난 틈을 타 미국으로 달아났다. 최근 ‘이태원 살인사건’에 다시금 세상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검찰이 13년 만에 재수사 의지를 밝혀서이다. 사건기록, 방송 등 지금껏 밝혀진 각종 자료를 참고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무탈한 스물세 살의 일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꼬박꼬박 장학금을 받고 여자친구를 만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일이 터진 뒤, 세상은 변했다. 광기와 치기가 휘두른 칼날. 그러곤 꽃다운 청춘 하나가 맥없이 스러졌다. 우직하게 쌓아온 시간과 대기업 입사의 꿈도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가족의 삶도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수줍음도, 웃음도, 가리는 음식도 많은 아이였어요. 어린 조카를 데리고 나가 사진 찍는 걸 그렇게 좋아했고요. 다음 세상에는 꼭 호강하라고, 없는 집에서 태어나 억울한 일 겪지 말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요. 아들 죽인 놈 잡는 게 제 사명 같아요.”
꼬깃꼬깃한 대학성적표를 어루만지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린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고(故) 조중필 씨의 어머니 이복수(67) 씨의 시간은 1997년에 멎어 있다. 따르릉, 어둠 속에서 울린 낮고 불길한 전화 벨소리. 달려간 병원에서 본 아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딸 셋을 낳고 뒤늦게 얻은 착한 막내였다.
아들의 죽음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또 있다. 다 잡은 범인을 놓친 것이다. 한 수사기관이 범인을 잡고, 다른 기관이 그를 풀어주고, 또 다른 범인을 지목하고…. 기대와 실망의 지난한 반복 속에서 상처는 진즉 피딱지로 곪았다.
그래서 13년 만의 재수사 소식이 미덥지만은 않다. 숱한 탄원과 원망에도 꿈쩍 않던 검찰이었다. “용의자 소재 파악이 안 된다”는 답변만으로 성과 없이 흐른 시간들. 지난해 가을 관련 영화의 개봉으로 여론이 들끓고 나서야 재수사가 결정됐다. 아들 죽인 놈 잡겠다는 소원, 이번엔 이뤄질까. 한 번 더 믿어도 될까.
#핏빛 화장실
이태원에는 다양한 머리색과 젊음과 분방함이 넘친다. 매일같이 다른 언어를 쓰는 무리들이 술잔과 고민을 나누거나 등을 돌린다. 때론 흥청거림과 광기도 찾아든다. 1997년 4월3일 밤이 그랬다.
“엄마, 도서관 다녀올게요.”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은 전공 책과 취업 관련 책으로 묵직했다. 지난해 여름 의가사제대를 한 뒤 계획에 없던 시간이 생겼다. 어중간하게 낀 기간이지만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시계추처럼 도서관에 출퇴근 도장을 찍고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날도 날이 어둑해진 뒤에야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학교를 나섰다. 여자친구는 이태원에서 살았다.
밤 10시 이태원. 햄버거 가게가 있는 건물 4층의 클럽에서는 한국어와 영어를 반반 섞어 쓰는 10대 무리가 술과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짤막한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아더 패터슨과 183cm에 100kg이 넘는 에드워드 리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둘은 미군 내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가 됐다. 패터슨은 멕시코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리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재미교포다. 배가 고파진 이들은 1층의 햄버거 가게로 내려갔다.
같은 시각. 여자친구를 데려다주던 조씨는 돌연 소변이 마려웠다. 이태원에서 내려 한 햄버거 가게에 들렀다. 여자친구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화장실에 간 조씨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다림이 길어지자 여자친구는 화장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입을 막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오는 중년남자가 보였다. 뒤따라 들어간 남자 종업원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장실로 달려간 여자친구는 입을 틀어막았고, 곧이어 큰 소리로 외쳤다.
살해된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 씨는 매일 아들의 사진이 빼곡한 앨범을 보며 그리움을 달랜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피가 너무 많아서. 욕조에 피가 넘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남자 종업원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회상했다. 허름한 화장실은 온통 핏빛이었다. 나뭇가지 모양으로 바닥에 번진 핏줄기, 핏물 스프레이로 얼룩진 거울…. 조씨는 소변기 옆 귀퉁이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화장실 바닥은 차가웠고 핏물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선한 얼굴에 잘 어울리던 둥근 안경테도 다리가 꺾였다. 오른쪽 목 세 곳, 왼쪽 목 네 곳, 가슴 두 곳. 모두 아홉 군데가 찔렸다. 한 칼 한 칼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굵고 깊었다. 치명타는 단숨에 끊긴 왼쪽 목 동맥이었다. 소리칠 겨를도 없는 죽음이었다.
#엇갈린 진술
지난해 여름, 머리 희끗한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이태원 살인사건으로 인연을 맺은 당시 서울 용산서 강력반 소속 김락권 형사와 미군범죄수사대(CID) 반장 토머스 반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말은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제 만난 형제처럼 가슴이 뜨거워진 이유. 둘은 같은 지점에서 분개하고 안타까움에 눈알을 부라린 ‘형사 동지’다.
“당시 경찰과 미군범죄수사대가 사건을 조사한 뒤 검찰에 넘겼어요. 저와 반즈 반장은 패터슨을 주범으로 지목했지만, 검찰은 결국 리만 살인혐의로 기소했죠. 반즈 반장은 당시에도 의협심이 대단했어요. 한국에 패터슨을 신병 인도한 뒤 징계를 받았죠. 저는 지금도 칼을 은닉한 패터슨이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사는 사건 이튿날 용산 미 8군 헌병대에 걸려온 제보전화로 시작됐다. 패터슨이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패터슨과 친구들을 조사하던 CID와 경찰은 또 다른 관련 인물을 발견한다. 패터슨과 어울리던 재미교포 리였다. 김 형사를 비롯한 경찰들은 서초구 방배동의 아파트로 향했다. 사람은 없었고, 현관에는 피 묻은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굴러다녔다. 이들은 다시 리와 그의 아버지가 머물고 있다는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CID와 경찰, 그리고 신병을 인도받은 검찰이 차례로 사건을 수사했다. 패터슨과 리, 그리고 현장에 있던 친구들을 하나둘 불러들였다.
“저놈이 죽였고 저는 단지 목격자예요.”
조사를 받던 용의자 둘은 기계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패터슨은 차분했고 리는 이따금 흥분했다. 당황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투닥투닥, 어깨를 부딪치고 웃음을 나눴다. 으스스한 조사실도, 차가운 쇠고랑도 그들에겐 모두 장난 같았다. “아버지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는 게 그 아이들의 정서였다”며 김 형사가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 아이들은 한국인 정서가 아니었어요. 국민성이나 자기 보호에 대한 처신이 우리와 확연히 달랐죠. 한국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표가 나는데, 그들은 천연덕스럽고 노련했어요. 대질심문에서 ‘네가 범인이다’라고 하다가도, 조사가 끝나면 ‘수고했다’며 포옹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CID와 검찰은 정반대의 수사결과를 내놓았다. CID는 패터슨, 검찰은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다른 정황과 증거와 논리들.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패터슨과 리처럼, 그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상황을 따라가면 이렇다.
미군범죄수사대 “범인=패터슨”
“나 갱단이야. 칼 멋있지?”
햄버거를 먹던 패터슨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칼날과 칼끝이 예리한 단도였다. 곁에 있던 친구들이 돌아가며 칼을 구경했다. 칼을 돌려받은 패터슨은 햄버거를 반으로 갈랐다. 반 동강이 난 햄버거를 여자친구와 나눠먹으며 감탄하는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히스패닉계 갱단인 ‘노르테14’의 단원이었다. 멕시코계가 많은 동네에서 자라 히스패닉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손등에는 점 4개짜리 문신을 새겼고, 사진을 찍을 땐 손가락 세 개를 거꾸로 들었다. ‘노르테14’ 단원들은 그런 행동을 한다.
“진짜 갱단이면 사람 죽일 수 있어?”
덩치 큰 리가 그를 자극했다. 쿵쾅쿵쾅, 순간 뭔가가 그를 거세게 충동질했다.
“따라와 봐. 화장실에 가자.”
패터슨은 리를 앞세워 화장실로 향했다. 손에 묻은 감자튀김 기름도 씻을 겸 리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변기 두 대와 세면대 하나로도 꽉 찬 좁은 화장실. 소변을 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는 허리를 숙여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손을 털고 고개를 든 순간, 거울에 비친 광경에 그만 숨이 멎었다. 패터슨이 소변보는 남자를 뒤에서 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목 동맥이 뿜어낸 피에 리도 피범벅이 됐다.
건물에서 나온 패터슨은 친구를 만나 바지를 바꿔 입었다. 칼은 하수구에 버리고 피 묻은 셔츠는 불태웠다. 바지와 셔츠, 양말은 다음날 미군부대 내 드래곤 호텔 보관함에 넣었다.
검찰 “범인=리”
패터슨이 칼을 꺼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유심히 칼을 살피던 리가 그 칼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패터슨에게 말했다. “I’ll show you something cool(뭔가 멋진 걸 보여줄게).” 패터슨은 그 뭔가를 마약이라고 생각했다. 리는 마약을 밀수해 복용하거나 이태원 일대에서 팔았다. 별 생각 없이 리를 뒤따랐다.
화장실에 들어선 리는 곧바로 소변기의 남자를 가격했다. 패터슨은 세면기 옆에 서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목과 가슴을 찔린 남자가 패터슨에 안기며 쓰러졌다. 그를 밀쳐내면서 바지와 티셔츠가 피로 흥건히 젖었다. 칼을 버리고 다시 클럽으로 돌아간 리는 옆자리 친구에게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
“리는 마약을 복용하고 파는 아이였어요. 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상한 행동을 상상했죠. 그날도 그랬던 거 같아요.”(패터슨)
“패터슨의 거짓말에 신물이 나요. 갱단이라면서 칼을 자랑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예요.”(리)
두 사람의 행동에는 모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패터슨은 왜 자신의 칼을 다른 사람이 가로챘는데도 가만히 있었을까. 손에 묻은 감자튀김 기름을 씻을 정도로 깔끔한 리가 피 묻은 셔츠를 입은 채 클럽으로 돌아간 이유는 뭘까. 두 사람의 진술은 햄버거 가게에서 친구들과 칼을 돌려보는 지점부터 엇갈린다. 의문스러운 공통점도 있다. 사건 당시에는 화장실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던 그들이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밝힌 인터뷰에서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말한 것. 이와 관련해 반즈 반장이 방송에서 밝힌 내용이 눈길을 끈다.
“4층에 있던 매큐라는 친구의 증언이에요. 피 묻은 셔츠를 입은 리가 깔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어떤 친구의 목을 칼로 찔렀어. 그저 재미로 그랬어.’ 매큐가 ‘네가 사람을 죽였지’라고 물었더니 ‘나는 아니야’라고 답했대요. 리가 패터슨에게 ‘갱단이면 칼로 사람을 찔러보라’고 충동했고, 이에 패터슨이 동요하면서 살인이 일어난 겁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속 한 장면.
“목 상처가 위에서 아래로 향해 있는 데다 방어흔이 없는 걸로 보아 범인은 조씨보다 키가 크고 힘이 셀 것입니다. 패터슨, 조씨, 리의 키는 각각 167cm, 176cm, 183cm이죠. 짧은 시간 거칠게 살인을 한 점에서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환각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의 부검 소견)
같은 해 4월26일 검찰은 리를 살인혐의, 패터슨을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부검 소견과 거짓말탐지기 반응이 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거짓말탐지기는 생체반응을 감지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치열한 공방을 거쳐 리는 1997년 10월2일, 98년 1월26일 서울지법과 서울고법에서 살인죄가 인정돼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98년 4월24일 대법원은 리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같은 해 9월30일 서울고법을 거쳐 99년 9월3일 재상고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패터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어 리의 단독범행이라고 하기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라디오에서 그 소식이 흘러나오는 순간, 조씨의 아버지 조송전(70) 씨는 버스운전대를 놓고 목울음을 쏟아냈다.
패터슨은 1998년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그해 8월15일 8·15 특사로 풀려났다. 일반적인 사면조치였다. 리가 무죄로 석방되자 유족은 패터슨을 살인죄로 고소했다. 그런데 검찰이 수사를 미루고 패터슨에 대한 출국금지 요청을 3개월간 갱신하던 중 사고가 터졌다. 출국금지 연장을 하지 않은 이틀간 패터슨이 한국을 떠난 것이다. 당시 담당 검사는 “검찰 인사 관련 일로 경황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만약’ 중필이가 살았더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1999년 8월23일에 기간이 끝난 걸 어떻게 알고 24일에 떠나나요? 높은 데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그래요?”
이후 어머니 이씨는 검찰 문턱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발품 팔아 서명운동을 벌였고, 거듭 재수사를 요청했다. 사립탐정을 고용해 미국으로 달아난 패터슨의 주소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그래도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는 동안 국회의원 이름도 줄줄 꿰게 됐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면 국회의원이 최고다 싶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다. 괜한 오해와 냉대를 받은 날에는 아들이 더 보고 싶었다.
현재 여섯 살배기 아들의 아빠가 된 리는 한국에 살고 있고, 패터슨은 미국에 있다. 재수사 방침이 밝혀지자 리는 인터뷰를 통해 협조 의지를 밝혔다. 최근 SBS가 미국에서 찾아내 만난 패터슨은 “내가 범인은 아니지만 재수사가 가족과 일에 영향을 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재수사 과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월 초 미국대사관에 범죄인 인도 요청서를 전달했고 이후 미국무부, 미법무부, 관할 검찰청을 거쳐 인도 여부가 결정된다. BBK 사건 때 김경준을 인도하는 데 걸린 시간은 3년 반. 이번에는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뒤늦게 재수사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오세인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재수사의 뜻을 모르겠다. 그간 패터슨의 소재 파악을 인터폴에 요청했고 2009년에 ‘찾기 힘들다’는 공식 답변을 받았다. 주권 문제로 검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1998년 유족이 패터슨을 고소한 이후부터 수사를 해왔어요. 다만 인터폴로부터 패터슨의 소재 파악이 어렵다는 답변을 올해 초에 받아서 최근 다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런 와중에 한 방송사에서 패터슨의 소재를 파악해 저희도 미국 측에 확인 요청을 한 거고요. 방송사가 한 일을 검찰은 왜 못하느냐고들 하는데, 검찰이 미국에서 직접 파악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검찰의 설명에 가족들은 울화통이 터진다. 아들을 보낸 뒤 아버지 조씨는 술이 늘었다. 술이 들어가면 “의가사제대를 안 시켰으면 좋았지 않느냐”며 괜히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웃음을 잃은 이씨는 매일같이 ‘만약’을 되뇐다. ‘만약’ 그렇게 군대를 나오지 않았다면, ‘만약’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면 중필이는 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좋아하던 사진도 많이 찍었을 텐데….
“이번엔 꼭 범인을 잡아야 해요. 인터뷰도 그래서 하는 거예요.”
주름 팬 소박한 얼굴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