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온갖 가정을 속속 무너뜨렸다. ‘태양이 돈다’라는 믿음을 증명으로 파기해버렸고 ‘생명=탄생’이라는 신화에도 도전하고 있다. 과학의 접근법은 은밀하고 집요하며 파괴적이었다. 이지적이거나 시적이거나 맹목적인 길에는 증명이 존재하지 않았고 참과 거짓이 성립되지 않았지만, 과학은 그것을 엄밀히 구분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증명 전 단계의 가정을 ‘가설’이라 부르고 증명된 것을 ‘법칙’, 그 반대의 것을 ‘오류’라 칭하며 어느 쪽의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과학의 나팔소리는 우주를 흔들고 머지않아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신비까지 규명할 태세다. 그 안에서 인간은 고립되고 소외됐다.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질서의 지배자로 등극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궁극의 문제는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면 그 이전의 힘은 어디에서 태동하는지, 팽창하는 우주의 존재론적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영원히 줄 수 없고, 인간의 노동가치는 기계에 의해 대치되고 머지않아 인식과 지성마저 과학이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과학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문명의 진보와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개인화하고 소외시킨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은 부조리하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는 자연을 찾아 세속을 떠나고, 누구는 그 세속에서 치열한 쟁투를 벌인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존재하기 위해 일하는가. 수천 년의 문명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더 많은 것을 쥐고도 점점 불행해하는가. 존재는 고독하고 삶은 무의미하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 신(神)이라 부르는 의지처일 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반이성(反理性)이 곧 신은 아니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맹목적인 믿음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렇게 인간은 길을 잃어버렸다.
‘사무엘 베케트 희곡전집’(예니 펴냄)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이 책에 속한 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런 인간의 고뇌와 모순을 다룬 역작이다. 작품에서 말하는 ‘고도’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작가 자신도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고도’는 누군가에게는 신(god)으로 읽히고 누군가에게는 장화로, 누군가에게는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로 해석된다. 누구나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압축하는 한 줄은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고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블라디미르의 대사에 녹아 있다.
박경철<br>의사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