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이다. 무심코 밟은 낙엽 한 잎이 바사삭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꿈틀거린다. 하늘은 또 얼마나 높고 파란지.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시 한 수를 읊조린다.
가을은 누구나 여행자가 되는 계절이다. 터널을 이루는 은행나무, 새빨간 치마처럼 산을 두른 단풍, 황홀한 군무를 자랑하는 억새에 홀려 전국의 명소를 돌아다니게 된다.
작년 이맘때 터키를 3주간 여행하고 돌아온 뒤, 노란색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은행나무를 보며 나의 가을을 도둑맞았다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그래서 가을에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친구가 있으면 가을이 지난 뒤에 가라고 조언한다. 가을은 우리에게 내려진 축복이며, 가을의 우리 땅만큼 아름다운 곳은 많지 않다고.
포토샵에서 콘트라스트 효과를 준 것처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단풍과 하늘, 흔들리는 내 마음을 보는 것만 같은 산 위의 억새,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낼 듯한 호수까지, 색 잔치가 한창인 가을 속으로 들어가보자.
만산홍엽, 애기단풍 화려한 장성 백양사
붉은색이 이렇게나 매혹적이었던가, 붉은색이 이토록 다양한 색을 품었던가. 가을이 되면 붉은색을 다시 보게 해주는 단풍 예찬에 바쁘다. 전국에 수많은 단풍 여행지가 있지만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 비교적 여유롭게 특별한 단풍을 즐기고 싶다면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로 떠나보면 어떨까. 다른 단풍 명소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엄지손가락을 올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멋진 단풍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백양사는 631년 백제 무왕 32년에 승려 여환이 창건한 고찰이다. 가을만 되면 백양사 어귀에 단아하게 자리한 쌍계루 주변으로 오색 물감을 흩뿌린 듯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단풍구름 아래 다소곳하게 앉은 쌍계루는 백양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백양사의 단풍은 ‘애기단풍’이라고 불릴 만큼 단풍잎 크기가 자그마한 것이 특징이다. 어른 엄지손톱만 하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애기단풍은 다른 단풍에 비해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색도 선명하다. 올망졸망한 애기단풍의 붉은 빛깔과 백양사 곳곳에 심어진 비자림이 어우러져 백양사만의 독특한 멋을 풍긴다. 특히 주차장을 지나 쌍계루까지 가는 길이 단풍터널을 이뤄 어느 숲길보다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시간을 내 안쪽에 있는 학바위도 들러보자.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육당 최남선 선생은 학바위에 흰 맛, 날카로운 맛, 맑은 맛, 신령스러운 맛이 있다고 했을 만큼 이 바위를 비범하게 여겼다. 쌍계루에서 학바위까지는 왕복 2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백양사 단풍이 절정일 때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올해는 기온차가 커서 단풍이 더욱 화려하다. 화려한 단풍이 전국을 물들이고, 요즘 단풍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고즈넉한 단풍을 만나고 싶다면 다른 이들보다 부지런을 떨어보자.
‘가을엔 사색하게 하소서’…청송 주산지
가을의 기도를 드릴 필요도 없다. 서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 되는 곳. 수백 년을 살아온 왕버들나무와 함께 고요히 침묵하게 되는 곳. 경북 청송군에 있는 주산지다. 가을이 오기를 기다린 이유 중 하나도 주산지에 있다. 주산지는 가을에 가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피어나는 물안개며 그 고즈넉한 분위기며, 데칼코마니를 펼쳐놓은 듯 분명한 반영(反影)은 소심한 여행자를 심오한 철학자로 변신시킨다.
29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주산지는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 7.8m로 그다지 큰 저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주산지의 능수버들과 왕버들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나무와 물의 경계는 세상과 선계와의 경계가 아닐까.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생과 사, 끊임없이 물음표가 떠오르는 곳이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는데, 지인 중에는 주산지를 여행했지만 영화 속 풍경을 보지 못했다며 투덜거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 그것도 여름철에 가지 않았을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주산지는 아무 때나 아름다움을 펼쳐보여주지 않는다. 진짜 주산지를 만나려면 가을, 그것도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 가야 한다. 카메라를 들어도, 놓아도 좋다.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주산지의 모습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 삼각대는 필수.
주산지에 갔다면 주왕산과 사과농장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청송 사과는 전국에서 당도가 가장 높은 명품 사과로 인정받는다. 지금 청송에 가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볼 수 있다.
가을의 제주는 온통 은빛 물결
이맘때 제주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관광객들의 질문 중 하나가 “제주 어디에 가면 억새를 볼 수 있나요?”라고 한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돌담 아래에 가도 지천에 뿌려진 게 억새인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서 해보자. “어디에서 보는 억새가 가장 아름다운가요?”라고.
이 물음에 대한 답 또한 쉽지 않을 테지만, 아마 제주 사람들은 잠시 고민하다 중산간 지역을 추천해줄 것이다. 해안도로와 한라산 자락을 통과하는 길이나 남원과 조천을 연결하는 남조로, 성읍민속마을에서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특별하게 억새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광활한 들녘과 오름에서 황홀하게 춤추는 억새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억새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차를 타고 억새를 즐기고 싶다면 1119번 지방도로와 1115번 도로, 11번 국도(5·16 도로) 등을 추천한다. 그렇지만 꼭 억새가 많아야 맛인가. 억새는 고개 숙이고 흔들어대는 그 자체로 가을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담아내지 않을까. 올 가을에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계획한 일정일랑 멀리 던져놓고 다녀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너무 계획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며칠쯤은 들판을 뛰노는 망아지처럼 억새를 따라 무작정 돌아봐도 좋으리라.
올 가을 제주여행의 주제를 억새로 잡았다면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평생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 씨의 혼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 최근에는 이 갤러리가 카메라 광고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김영갑 작가가 만난 제주도의 ‘삽시간의 황홀’을 가슴에 품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도 우리만의 꿈을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은 누구나 여행자가 되는 계절이다. 터널을 이루는 은행나무, 새빨간 치마처럼 산을 두른 단풍, 황홀한 군무를 자랑하는 억새에 홀려 전국의 명소를 돌아다니게 된다.
작년 이맘때 터키를 3주간 여행하고 돌아온 뒤, 노란색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은행나무를 보며 나의 가을을 도둑맞았다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그래서 가을에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친구가 있으면 가을이 지난 뒤에 가라고 조언한다. 가을은 우리에게 내려진 축복이며, 가을의 우리 땅만큼 아름다운 곳은 많지 않다고.
포토샵에서 콘트라스트 효과를 준 것처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단풍과 하늘, 흔들리는 내 마음을 보는 것만 같은 산 위의 억새,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낼 듯한 호수까지, 색 잔치가 한창인 가을 속으로 들어가보자.
만산홍엽, 애기단풍 화려한 장성 백양사
붉은색이 이렇게나 매혹적이었던가, 붉은색이 이토록 다양한 색을 품었던가. 가을이 되면 붉은색을 다시 보게 해주는 단풍 예찬에 바쁘다. 전국에 수많은 단풍 여행지가 있지만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 비교적 여유롭게 특별한 단풍을 즐기고 싶다면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로 떠나보면 어떨까. 다른 단풍 명소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엄지손가락을 올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멋진 단풍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백양사는 631년 백제 무왕 32년에 승려 여환이 창건한 고찰이다. 가을만 되면 백양사 어귀에 단아하게 자리한 쌍계루 주변으로 오색 물감을 흩뿌린 듯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단풍구름 아래 다소곳하게 앉은 쌍계루는 백양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백양사의 단풍은 ‘애기단풍’이라고 불릴 만큼 단풍잎 크기가 자그마한 것이 특징이다. 어른 엄지손톱만 하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애기단풍은 다른 단풍에 비해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색도 선명하다. 올망졸망한 애기단풍의 붉은 빛깔과 백양사 곳곳에 심어진 비자림이 어우러져 백양사만의 독특한 멋을 풍긴다. 특히 주차장을 지나 쌍계루까지 가는 길이 단풍터널을 이뤄 어느 숲길보다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시간을 내 안쪽에 있는 학바위도 들러보자.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육당 최남선 선생은 학바위에 흰 맛, 날카로운 맛, 맑은 맛, 신령스러운 맛이 있다고 했을 만큼 이 바위를 비범하게 여겼다. 쌍계루에서 학바위까지는 왕복 2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백양사 단풍이 절정일 때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올해는 기온차가 커서 단풍이 더욱 화려하다. 화려한 단풍이 전국을 물들이고, 요즘 단풍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고즈넉한 단풍을 만나고 싶다면 다른 이들보다 부지런을 떨어보자.
‘가을엔 사색하게 하소서’…청송 주산지
가을의 기도를 드릴 필요도 없다. 서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 되는 곳. 수백 년을 살아온 왕버들나무와 함께 고요히 침묵하게 되는 곳. 경북 청송군에 있는 주산지다. 가을이 오기를 기다린 이유 중 하나도 주산지에 있다. 주산지는 가을에 가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피어나는 물안개며 그 고즈넉한 분위기며, 데칼코마니를 펼쳐놓은 듯 분명한 반영(反影)은 소심한 여행자를 심오한 철학자로 변신시킨다.
백양사 쌍계루(좌). 침묵과 사색의 공간, 청송 주산지(중). 제주 우도의 억새(우).
그들은 아마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 그것도 여름철에 가지 않았을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주산지는 아무 때나 아름다움을 펼쳐보여주지 않는다. 진짜 주산지를 만나려면 가을, 그것도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 가야 한다. 카메라를 들어도, 놓아도 좋다.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주산지의 모습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 삼각대는 필수.
주산지에 갔다면 주왕산과 사과농장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청송 사과는 전국에서 당도가 가장 높은 명품 사과로 인정받는다. 지금 청송에 가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볼 수 있다.
가을의 제주는 온통 은빛 물결
이맘때 제주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관광객들의 질문 중 하나가 “제주 어디에 가면 억새를 볼 수 있나요?”라고 한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돌담 아래에 가도 지천에 뿌려진 게 억새인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서 해보자. “어디에서 보는 억새가 가장 아름다운가요?”라고.
이 물음에 대한 답 또한 쉽지 않을 테지만, 아마 제주 사람들은 잠시 고민하다 중산간 지역을 추천해줄 것이다. 해안도로와 한라산 자락을 통과하는 길이나 남원과 조천을 연결하는 남조로, 성읍민속마을에서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특별하게 억새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광활한 들녘과 오름에서 황홀하게 춤추는 억새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억새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차를 타고 억새를 즐기고 싶다면 1119번 지방도로와 1115번 도로, 11번 국도(5·16 도로) 등을 추천한다. 그렇지만 꼭 억새가 많아야 맛인가. 억새는 고개 숙이고 흔들어대는 그 자체로 가을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담아내지 않을까. 올 가을에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계획한 일정일랑 멀리 던져놓고 다녀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너무 계획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며칠쯤은 들판을 뛰노는 망아지처럼 억새를 따라 무작정 돌아봐도 좋으리라.
올 가을 제주여행의 주제를 억새로 잡았다면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평생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 씨의 혼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 최근에는 이 갤러리가 카메라 광고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김영갑 작가가 만난 제주도의 ‘삽시간의 황홀’을 가슴에 품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도 우리만의 꿈을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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