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의 궁중연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하루하루를 삼가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접할 때 공손함을 생각하소서(願聖上日愼一日 不自驕滿 接下思恭).”
그로부터 500년 후 연산군은 조선 성종(成宗)의 원자로 태어나 세자가 되고 18세에 보위에 올랐으나 스스로 제왕의 모습을 저버려 재위 12년 만인 연산군 12년(1506) 9월2일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신왕으로 즉위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그날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연산군일기’ 제63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패악과 방탕으로 쫓겨난 뒤 역병으로 삶 마감
“금상(今上·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함으로 성종이 할 수 없이 종묘에 아뢰고 왕비를 폐하였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에 있었는데…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로 세웠다. …세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임술·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한 짓이 많음으로… 조종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며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여… 이윽고 무인일(9월1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대군에게 돌아갔으므로…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며 이가(俚歌·속요)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忠誠是詐謀)
거동은 곧 교동일세(擧動卽喬桐)
일만 흥청 어디 두고(一萬興淸何處置)
석양 하늘에 뉘를 쫓아가는고(夕陽天來去誰從)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己哉此亦娘婦家)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無妨達曙且從容)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喬桐)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려 노래한 것이다.”
연산군은 그해 11월 서른의 나이로 교동에서 역병(疫病)으로 죽었는데,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묘호와 능호 없이 왕자 신분으로 기록됐고,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강등됐으며, 능도 ‘연산군지묘’로 남아 있다.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혼군(昏君)이자 폭군(暴君)인 연산군 시기에 국왕의 패악과 방탕에 빌붙어 산 유자광(柳子光·?~1512)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당시가 얼마나 황음의 세월이었는지를 살펴보자.
간신 유자광, 훈작 삭탈당하고 눈먼 채 사망
4월30일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봉하마을을 나서면서 심경을 밝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무오년 7월17일 연산군은 교지를 내려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 제자들을 사초사건과 관련지어 제거했는데, 이를 사화(史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그 후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으로 책록됐으나 그의 간흉한 성정 탓에 필자 미상의 탄핵 상소문이 올라왔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를 망치는 간사한 자들은 대부분 갑자기 역적 행위를 한다거나 임금을 위태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겉으로는 충성하는 체하며 속으로 음흉하고 간사한 꾀를 써서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허물을 알아도 노여워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들의 뜻을 성취하고 나라를 망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간의 말에 따라 유자광의 죄를 천단함으로써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는 것이 국가를 위해 다행한 일이옵니다.”
결국 조정에서 독사처럼 권세를 휘두르던 유자광은 대간과 홍문관, 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훈작을 삭탈당하고 관동으로 유배됐다가 경상도 변군으로 옮긴 뒤 눈이 먼 채 죽고 말았다. 유자광이 죽은 뒤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장사지내기를 윤허했으나, 아들 진(軫)은 여색에 빠져 끝내 가보지 않았고, 다른 아들 방(房) 또한 병을 칭탁하고 손님들과 함께 술 마시면서 장사를 외면했다고 한다.
중종반정 이후 500년이 흐른 2009년 봄 대한민국에서는 오욕된 역사의 반복을 보는 듯 황음의 세월이 계속된다. 전직 대통령의 형과 최측근이 구속되고 그의 부인과 아들, 조카 등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으며, 급기야 본인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노무현 게이트’와 관련한 판도라의 상자가 드디어 열리면서 얽히고설킨 비리 넝쿨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형이 뇌물을 받고, 부인이 검은돈을 받고, 아들이 불법 유학자금을 받을 때 그는 전혀 몰랐다면서 인터넷 홈페이지에다 ‘양치기 소년’처럼 궁상맞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대통령 재임 당시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주장하고, “이권 개입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하면서 정직한 링컨을 내세우며 도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수줍은 듯 촌스러운 미소에 고졸 학력, 서민 대통령이란 이미지로 다가온 그가 사실은 억대의 손목시계를 찬 로열패밀리로 그들만의 향연을 즐겼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왜 그는 시정배(市井輩)들이 좋아하는 전벽(錢癖·돈을 밝힘)에 연연했을까.
왜 그의 측근들은 직언하지 않고 장단 맞춰 춤을 췄을까.
이 화사하고 찬란한 염양(艶陽)에 ‘장수천’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어사전에는 ‘야누스적인, 너무나 야누스적인’의 동의어로 ‘노무현스럽다’라는 부끄러운 신조어 하나를 보태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