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지하철을 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레온은 이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채 누군가의 식육으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류의 공포영화일수록 냉전체제의 매카시적 광기나 AIDS 같은 질병으로 인해 조성된 집단의 배타성, 9·11 테러로 만들어진 타자(他者)에 대한 무작위적인 정치적 공포 등의 얘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스크린 속 풍경이 너무 잔인한 게 아니냐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피와 살점이 튀겨나가는 장면들, 그 자체보다는 좀더 안쪽을 바라볼 일이다.”
웨스 크레이븐과 함께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클라이브 바커는 그러나, 공포영화의 그 같은 맥락에서 다소 다른 길로 비껴간 인물이다. 바커의 영화 혹은 그가 쓴 소설, 뭉뚱그려서 바커의 모든 작품은 그보다 좀더 순수한 공포를 그린다. 일종의 공포영화로서 지켜야 할 퓨어리즘(purism)을 표방한다고 할까.
야간 지하철 기이한 일들 극단적 잔인함
바커가 쓰고 일본의 기타무라 류헤이가 연출한(요즘 할리우드에는 이처럼 일본 감독들이 건너가 공포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트렌드화되고 있다. 나카다 히데오가 자신의 영화 ‘링’의 리메이크판을 만드는가 하면 시미즈 다카시는 ‘주온’을 ‘그루지’란 제목으로 다시 만들었다. 기타무라 류헤이는 ‘버수스’ ‘소녀검객 아즈미’ 등의 영화로 국내에도 많은 마니아 팬을 거느리고 있는 인물이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여기에선 미국사회의 특정 문제를 다룬 정치사회적 이슈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보다는 순수 공포영화로서의 혈통이 느껴진다.
이런 공포영화일수록 이야기도 현실감하고는 거리가 있는 법이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줄거리를 설명하면 이렇다.
주인공 레온(브래들리 쿠퍼)은 아직 유명세를 타진 않았지만 잠재 능력을 인정받아 개인전 열 채비에 열을 올리는 사진가다. 그가 찍는 대상은 뉴욕의 밤거리. 그의 에이전트가 될 유명 큐레이터(브룩 실즈)의 요구대로 레온은 오늘도 어둡고 위험한 밤거리를 누빈다. 그러던 차에 그의 눈에 띈 것은 야간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밤늦게 지하철을 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레온은 이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채 누군가의 식육으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레온은 애인인 마야(레슬리 비브)의 만류에도 사건에 매달리고 곧 자신도 인육이 될 처지에 놓인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 거꾸로 매달린 남녀의 벌거벗은 시체들은 요즘 우리가 뉴스 화면에서 자주 목도하는 도살장의 쇠고기를 닮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광우병이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담고 있는 정치사회학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몸뚱이 역시 한 치의 차이로 언제든지 ‘쇠고기스러울 수 있다’는 측면만큼은 연상시킨다.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몰(沒)인간의 차이란 영화에서처럼 지하철 한 칸의 차이이며, 밤에 타는 열차와 낮에 타는 열차의 차이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특정한 정치 지형도를 유출하기는 쉽지 않다. 바커와 기타무라 류헤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애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보다 순수하게 지금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둠의 원천을 그려내려 한다. 우리들이 마음속 심연에 담아두고 살아가는, 어쩌지 못하는 악마성을 툭 꺼내놓고선 당신들이 사실은 얼마나 살육에 익숙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바커의 정신세계를 있는 그대로 구현하겠다는 듯 기타무라 류헤이는 극단적 잔인함을 펼쳐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시도한다.
바커의 정신세계를 있는 그대로 구현하겠다는 양 기타무라 류헤이는 극단적 잔인함을 펼쳐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시도한다. 우리는 얼마나 악마적인가. 그 악마성의 순환궤도에서 어떻게 이탈을 시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있는가. 영화의 우울한 결말은 그게 결코 그럴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잔인하고 지저분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지하철 안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이다. 기타무라 류헤이는 여자의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을 바로 그 여자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죽어가는 순간 저 멀리 떨어져나간 자신의 몸뚱이를 지켜보게 된다. 참혹한 장면이지만, 그게 진짜 끔찍한 이유는 자신이 자신의 생명조차 어쩌지 못하는 현대인의 무기력증을 보는 것 같아서다. 이런 영화를 왜 보냐고? 무기력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기력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 영화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흐르는 핏줄기와 터지는 골수, 난도질당한 팔다리들을 맨 정신으로 보고 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불편하다. 공포영화의 불편함은 다른 요소들과 훌륭히 결합될 때 진정한 공포감을 준다. 바커의 공포는 ‘의도적으로’ 다른 요소와의 결합을 꺼린다. 대신 보는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다의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에 대한 호오(好惡), 호평과 혹평이 엇갈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 다 사족이다. 그냥 즐기시길 바란다. 물론 즐기지 못하는 분들도 많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