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경찰은 미끄럼방지 목장갑을 끼고 맨션 홈통을 기어올라 잠입한 용의자를 ‘스파이더맨’에 빗대며 그의 놀라운 범행에 아연실색했다. 경찰 조사에서 100건에 이르는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용의자는 “고층만 노렸다” “체력과 높은 곳에는 자신 있다”는 말까지 당당하게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얼마 전 한국. 우연일까, 일본 스파이더맨에 견줄 만한 전문 절도범이 나타났다. 이 범인 역시 서울 강남, 수원, 울산 등 대도시 고급 아파트의 고층만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 가스 배관 등을 타고 올라 잠입하는 방법도 일본 범인과 같았다.
은행원 출신 전과자와 공모 … 훔치고 처리하고 ‘분업’
검거 직후 “어릴 때부터 철봉의 달인이었다. 20층 아파트도 5분이면 배관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하는 모습도 어찌 그리 닮았을까. 수사를 맡은 수서경찰서 박성주 형사과장이 범인 검거 후 ‘스파이더맨’이라는 표현을 섞어 혀를 내두른 점 또한 일본의 스토리와 흡사하다.
그렇다고 완전한 표절은 아닐 듯하다. 대담한 범행행각은 한술 더 떴다. 마치 일본의 사례를 인지하고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범인은 장갑 없이 맨손으로 나섰다. 전봇대고 가스통이고, 손에 접착제를 발라놓은 것처럼 그에겐 익숙한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치밀하고도 완벽한 범죄를 위해 파트너까지 두며 역할을 분담했다. 구체적인 사전준비도 필수. 이들 앞에 경비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 범인들이 털어놓은 범행 횟수도 무려 300여 건. 비슷한 기간에 100여 건을 저지른 일본 범인보다 범행 순도(?)와 수법 면에서 한 수 높은 실력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수서경찰서는 6월28일 전국의 고급 아파트만 골라 돈을 훔친 절도 전과자 장모(27) 씨와 전직 은행원 출신 박모(36) 씨를 검거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 건수는 114건. 피해 액수만도 10억원에 이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어떻게 함께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2006년 부산교도소에서 처음 조우했다. 당시 장씨는 절도 혐의로, 꽤 긴 시간 은행원으로 재직했던 박씨는 은행 예금정보를 빼돌려 팔아넘기다 공문서 위조 및 사기 등으로 기소돼 복역 중이었다. 교도소 내 공장에서 만난 이들은 경상도 사투리 말투에 고향도 엇비슷해 형님 동생 하며 쉽게 인연을 텄다. 이후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출소한 이들은 가끔씩 서로 연락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아무리 교도소 출소 동기라 해도 그전까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 그러나 돈과 연관된 절박한 상황이 그들 사이에 놓이게 됐고, 출소 이후 다시 범행을 위해 손잡았다. 특히 박씨는 출소 후 악기사업에 실패하고 희귀병에 걸린 자식의 수술비를 대면서 진 빚을 감당하지 못하던 상황이어서 해결책이 절실했다.
구석에 몰린 박씨의 처지가 계기가 돼 뭉친 이들은 서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선에서 절도 범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장씨가 절정의 체공력을 이용, 새벽에 고층 아파트로 잠입을 시도하면 박씨가 주변 정황을 살피고 훔친 돈을 대포통장 등을 이용해 처리하기로 했다.
무려 300여 건의 절도 행각을 벌여온 장모 씨와 박모 씨는 범행 8개월 만에 다시 교도소에서 만날 처지가 됐다(위). 5월 장씨가 도곡동 아파트에 잠입하기 위해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범행 직전 준비 역시 철저했다. 범행 타깃으로 삼은 집은 미리 답사해 주변 작은 시설물까지 완벽하게 익혔다. 수서경찰서 강력3팀 한동수 팀장은 “아파트 경비는 각 동마다 어떻게 서고, 차는 어디다 세워야 하는지 등 동선마다 구체적인 스토리를 구성할 만큼 치밀했다. 경비시스템은 당연히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부천에 오피스텔을 얻어 함께 기거한 이들은 오전에 범행 지역을 답사한 뒤 오피스텔에서 초저녁잠을 자고 오후 11시경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훔친 돈 한 사람은 유흥비로, 한 사람은 아이 병원비와 빚 변제에 써
이런 식의 범행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심지어 도곡동 P아파트는 한 차례에 다섯 가구를 잇따라 털었다. 전직 부총리와 유명 로펌 변호사 집에도 잠입해 금품을 가져갔다. 한번은 집주인에게 발각되기도 했으나 신체 위협을 가하면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범행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현금에서 점점 시계나 카메라 등 장물까지 훔쳤고, 심지어 통장과 수첩도 챙겼다. 한 팀장은 “보통 사람들이 통장이나 수첩에 계좌 비밀번호를 적어놓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갑뿐 아니라 수첩까지 털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피해자들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대포통장으로 현금을 빼돌렸으며, 신용카드는 통장 비밀번호가 같은 경우 철저하게 현금서비스만을 받아 돈을 갈취했다.
경찰은 4개월 전부터 주민들의 피해 신고가 접수되자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CCTV의 사각지대만을 찾아다닌 범인들은 쉽게 발각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서는 사건현장 CCTV에 노출된 범인들의 산타페 차량 차번호 두 자리. 경찰이 이 번호를 가진 산타페를 전국에 조회한 결과 무려 600여 대나 됐다. 경찰은 3개월간의 추적 끝에 검거 한 달 전쯤 울산지역 번호를 가진 산타페가 서울 및 전국을 누빈 사실을 발견하고 집중 탐문에 나섰다. 한 달간 이들의 행적을 근접거리에서 추적, 단서를 확보해나간 경찰은 두 사람이 아파트에서 범행을 한 뒤 사라지는 모습을 발견하고 부천 오피스텔 앞에서 귀가하는 범인을 검거했다.
경찰조사 결과 장씨는 나눠 가진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박씨는 아이 병원비와 빚 변제 등에 쓴 것으로 밝혀졌다. 검거 당시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것은 채 처리하지 못한 1000만원 이상 호가하는 명품시계 5~6점과 현금 100여 만원, 무전기, 캠코더, 모의권총 등이었다. 현재 검찰로 사건이 송치된 가운데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수서경찰서엔 연일 범인에게 절도를 당했다는 피해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범인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범행, 앞으로 그들의 범행 기록에 추가될 사건 수는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