롄지에펑공(廉潔奉公), 웨이런정파이(爲人正派), 정지투추(政績突出).
지난해 10월22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장가오리(張高麗·62·사진) 톈진(天津)시 당서기에 대한 평가다. 청렴결백하고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는 데다, 품행이 올바르고 정치적 업적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1970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 석유기업 노동자로 출발해 37년 만에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힌 것은 바로 이런 장점을 갖췄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그가 허언(虛言)을 좋아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만 말하며 일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한다고 전한다.
장 위원은 푸젠(福建)성 진장(晋江) 출신이다. 공장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최고의 지방관’인 성(省)·직할시의 당서기를 거쳐 지난해 10월 단 25명에 그치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됐다.
선전시 하이테크 산업 유치 큰 업적
그는 샤먼(廈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1960~70년대 중국 대륙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전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석유부 산하 광둥(廣東)성 마오밍(茂名)시의 마오밍석유공사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이후 석유공사에서만 16년을 일하면서 판공실 비서, 석유제련공장 부서기와 서기 등을 거쳐 1985년 마오밍석유공업공사 경리직까지 올라갔다. 석유공사에서의 성실한 업무 태도는 차츰 광둥성에 알려졌다. 그는 85년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1988년 광둥성 부(副)성장을 거쳐 93년엔 광둥성 상무위원 겸 부성장, 97년 선전(深)시 당서기, 2000년 광둥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이어 2001년 산둥(山東)성 부서기를 거쳐 2002년엔 산둥성 서기 겸 성장에서 지난해 3월 톈진시 당서기에까지 올랐다. 경제특구(선전), 경제대성(광둥성과 산둥성), 직할시(톈진)를 운영하면서 국가 지도자로서 쌓아야 할 경력을 충분히 쌓은 셈이다.
그가 경력을 쌓으면서 이룬 정치적 업적도 누구 못지않다. 1988~2001년 그는 선전시 서기로 일하면서 선전시를 하이테크 산업과 숲으로 싸인 정원 같은 선진도시로 만들어 다른 도시를 놀라게 했다.
2001년부터 2007년 초까지 그는 산둥성 성장과 서기로 재직하면서 산둥성을 무역과 하이테크 산업, 민간경제의 ‘대성(大省)’으로 끌어올렸다. 2006년 산둥성은 국내총생산(GDP)이 처음으로 2조 위안(약 257조원)을 돌파하며 광둥, 장쑤(江蘇)성에 이어 전국 3위에 랭크됐다. 이런 공적 때문에 지난해 3월 그가 톈진시 서기로 발령받았을 때 허궈창(賀國强)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톈진시가 매우 얻기 힘든 발전의 기회를 맞았다”고 시 간부들에게 강조했다.
중국 중앙지도부는 특히 장 위원의 당무와 경제업무 처리 능력, 복잡한 문제에 대한 파악과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톈진 직할시는 중국의 경제구도상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다. 주장(珠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선전과 창장(長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상하이(上海)에 이어 환(環)보하이(渤海)만 경제권의 중심지가 바로 톈진이다. 2020년까지 톈진을 북방경제의 중심도시로서 ‘국제 항구도시’ ‘생태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중국정부의 장기적인 계획이다. 톈진시의 빈하이(濱海) 신구(新區)에 부가가치 높은 하이테크 산업을 양성해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을 세우고 동시에 금융개혁의 혁신기지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톈진에 오자마자 고위 간부들을 베이징(北京)과 상하이, 선전, 샤먼 등 각지로 학습 고찰을 나가게 했다. 고찰 지역의 개발·개방 상황과 행정관리의 혁신, 도시건설 상황, 산업발전 및 환경보호 상황을 파악해 오되 각 고찰 지역과의 협력, 합작을 위한 준비까지 마치도록 했다. 즉 중국 동부의 선진도시를 둘러봄으로써 톈진시 관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한 것이다.
특정 정파 소속 아닌 것이 失이자 得
그는 톈진을 빈하이 신구와 전통 도시지역, 교외의 농촌지역으로 나눈 뒤 세 지역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으로 외자유치에 진력했다. 2006년 6월 유럽의 에어버스사(社)가 약 70억 유로(8조5000억원)를 들여 A320 150인승 중형 여객기의 조립공장을 톈진에 세우기로 한 게 대표적인 성과다. 푸젠성 출신인 그는 특히 대만 기업인을 톈진에 많이 끌어들였는데, 현재 대륙에 있는 7만여 대만 기업 중 10%가 환보하이만 지역에 집중돼 있다.
특정 정파에 속해야 출세하는 중국 정계에서 장 위원은 특별하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상하이방(上海幇)도 아니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계열 출신)도 아니다. 당·정·군 고관대작 자녀들의 파벌인 태자당(太子黨)은 더더욱 아니다.
올해 62세인 장 위원은 5세대 지도부가 본격 출범하는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톈진시의 굴기(起)’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산둥성과 선전시에서 재직할 때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룰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지난해 10월22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장가오리(張高麗·62·사진) 톈진(天津)시 당서기에 대한 평가다. 청렴결백하고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는 데다, 품행이 올바르고 정치적 업적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1970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 석유기업 노동자로 출발해 37년 만에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힌 것은 바로 이런 장점을 갖췄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그가 허언(虛言)을 좋아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만 말하며 일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한다고 전한다.
장 위원은 푸젠(福建)성 진장(晋江) 출신이다. 공장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최고의 지방관’인 성(省)·직할시의 당서기를 거쳐 지난해 10월 단 25명에 그치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됐다.
선전시 하이테크 산업 유치 큰 업적
그는 샤먼(廈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1960~70년대 중국 대륙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전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석유부 산하 광둥(廣東)성 마오밍(茂名)시의 마오밍석유공사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이후 석유공사에서만 16년을 일하면서 판공실 비서, 석유제련공장 부서기와 서기 등을 거쳐 1985년 마오밍석유공업공사 경리직까지 올라갔다. 석유공사에서의 성실한 업무 태도는 차츰 광둥성에 알려졌다. 그는 85년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1988년 광둥성 부(副)성장을 거쳐 93년엔 광둥성 상무위원 겸 부성장, 97년 선전(深)시 당서기, 2000년 광둥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이어 2001년 산둥(山東)성 부서기를 거쳐 2002년엔 산둥성 서기 겸 성장에서 지난해 3월 톈진시 당서기에까지 올랐다. 경제특구(선전), 경제대성(광둥성과 산둥성), 직할시(톈진)를 운영하면서 국가 지도자로서 쌓아야 할 경력을 충분히 쌓은 셈이다.
그가 경력을 쌓으면서 이룬 정치적 업적도 누구 못지않다. 1988~2001년 그는 선전시 서기로 일하면서 선전시를 하이테크 산업과 숲으로 싸인 정원 같은 선진도시로 만들어 다른 도시를 놀라게 했다.
2001년부터 2007년 초까지 그는 산둥성 성장과 서기로 재직하면서 산둥성을 무역과 하이테크 산업, 민간경제의 ‘대성(大省)’으로 끌어올렸다. 2006년 산둥성은 국내총생산(GDP)이 처음으로 2조 위안(약 257조원)을 돌파하며 광둥, 장쑤(江蘇)성에 이어 전국 3위에 랭크됐다. 이런 공적 때문에 지난해 3월 그가 톈진시 서기로 발령받았을 때 허궈창(賀國强)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톈진시가 매우 얻기 힘든 발전의 기회를 맞았다”고 시 간부들에게 강조했다.
중국 중앙지도부는 특히 장 위원의 당무와 경제업무 처리 능력, 복잡한 문제에 대한 파악과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톈진 직할시는 중국의 경제구도상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다. 주장(珠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선전과 창장(長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상하이(上海)에 이어 환(環)보하이(渤海)만 경제권의 중심지가 바로 톈진이다. 2020년까지 톈진을 북방경제의 중심도시로서 ‘국제 항구도시’ ‘생태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중국정부의 장기적인 계획이다. 톈진시의 빈하이(濱海) 신구(新區)에 부가가치 높은 하이테크 산업을 양성해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을 세우고 동시에 금융개혁의 혁신기지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톈진에 오자마자 고위 간부들을 베이징(北京)과 상하이, 선전, 샤먼 등 각지로 학습 고찰을 나가게 했다. 고찰 지역의 개발·개방 상황과 행정관리의 혁신, 도시건설 상황, 산업발전 및 환경보호 상황을 파악해 오되 각 고찰 지역과의 협력, 합작을 위한 준비까지 마치도록 했다. 즉 중국 동부의 선진도시를 둘러봄으로써 톈진시 관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한 것이다.
특정 정파 소속 아닌 것이 失이자 得
그는 톈진을 빈하이 신구와 전통 도시지역, 교외의 농촌지역으로 나눈 뒤 세 지역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으로 외자유치에 진력했다. 2006년 6월 유럽의 에어버스사(社)가 약 70억 유로(8조5000억원)를 들여 A320 150인승 중형 여객기의 조립공장을 톈진에 세우기로 한 게 대표적인 성과다. 푸젠성 출신인 그는 특히 대만 기업인을 톈진에 많이 끌어들였는데, 현재 대륙에 있는 7만여 대만 기업 중 10%가 환보하이만 지역에 집중돼 있다.
특정 정파에 속해야 출세하는 중국 정계에서 장 위원은 특별하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상하이방(上海幇)도 아니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계열 출신)도 아니다. 당·정·군 고관대작 자녀들의 파벌인 태자당(太子黨)은 더더욱 아니다.
올해 62세인 장 위원은 5세대 지도부가 본격 출범하는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톈진시의 굴기(起)’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산둥성과 선전시에서 재직할 때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룰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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