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왼쪽이 브라이언 오셔, 오른쪽이 데이비드 윌슨.
김연아를 처음 봤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2004년 12월7일 인천공항에서였다. 취재진 앞에서 김연아는 무표정했다. 질문을 받아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모습이 당시 김연아의 평소 모습이었다.
힘든 피겨에서 즐기는 피겨로…10대 본모습 되찾아
지금의 김연아는 그때 모습과는 무척 달라 딴사람 같다. 자신 안으로만 꼭꼭 숨으려 하던 내성적인 소녀가 어떻게 이처럼 풍부한 표정의 사람으로 바뀐 것일까. 언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일까.
아마도 ‘이 남자들’과의 만난 뒤부터가 아닐까 싶다. 두 명의 캐나다 남자, 브라이언 오셔(46) 코치와 올 시즌 김연아의 전속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40)이다.
먼저 윌슨 얘기부터 해야겠다. 온타리오 노블턴 출신의 그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피겨스케이팅 선수로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5세 때 스케이트화를 처음 신었고 9세부터 대회에 나갔다. 그때 이미 동성애적 성향이 드러났던 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홀로 타는 피겨스케이팅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하지만 18세 때 왼쪽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접었다. 그는 “원래부터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며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경쟁과 관계없는 아이스쇼에서 그는 비로소 피겨와 사랑에 빠졌고, 안무가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그가 독창적인 안무로 막 이름을 알릴 즈음인 1997년 오셔를 만났다.
오셔는 여러모로 윌슨과는 대조적인 사람이다. 그는 부드럽고 말이 많지 않지만, 경쟁과 도전을 즐긴다. 온타리오 벨레빌 출신의 오셔는 캐나다의 피겨 영웅이다. 1981년부터 88년까지 8년 연속 캐나다 피겨 챔피언이었고 세계선수권에서 우승 한 차례, 준우승 네 차례를 했다. 유일하게 동계올림픽에서만 정상에 서지 못했다. 84년과 88년 출전해 모두 은메달에 그쳤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그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브라이언 보이타노와 우승을 다퉜는데, 당시 두 사람의 대결이 얼마나 치열하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지 둘의 이름을 따 ‘브라이언 전투’로 불릴 정도였다. 남자 싱글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그는 선수 초반엔 ‘미스터 트리플 액셀’로 불릴 만큼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혔지만, 후반엔 예술적 연기로 더 유명했다. 1988년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아이스쇼 단원으로 활동하며 또다시 명성을 쌓았다. 윌슨을 처음 만날 무렵 오셔는 아이스쇼 연기자로서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고, 얼음판 밖에서는 동거하던 남자친구의 이별 위자료 소송으로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나 상처받고 있었다. 당시에 대해 오셔는 “나 자신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윌슨의 독창적인 안무와 피겨에 대한 열정이 그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오셔는 사업에서도 성공…포르셰 타는 백만장자
오셔가 대부분 얼음 위에서만 김연아와 만난다면, 윌슨은 김연아와 가끔 공연을 보러 가는 등 더 가깝게 지낸다.
윌슨은 2006년 여름 오셔가 총책임자로 있는 ‘토론토 크리킷 스케이팅과 컬링클럽’에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의 안무를 손보기 위해 찾아온 김연아를 처음 만났다. 윌슨은 오셔를 변화시켰듯 김연아도 변화시켰다.
윌슨은 “함께 온 한국 피겨연맹 관계자들이 저에게 주문한 것은 김연아를 행복한 피겨 선수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연아가 미소를 짓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해 여름의 끝에 김연아는 피겨를 즐기고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활달한 10대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부동산과 여러 사업에 투자해 성공한 오셔는 현재 포르셰 자동차를 몰고 랜드로바사의 4륜구동으로 험로 주행을 즐기는 백만장자다. 그는 삶의 여유와 휴식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점 때문에라도 훈련만이 삶의 최우선이던 김연아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오셔와 윌슨, 김연아. 이 세 사람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 함께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