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 스캔들을 다룬 영화 ‘스캔들’.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 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모과(木瓜)]
송나라 주희는 ‘시집전(詩集傳)’에서 ‘모과’는 남자를 유인하는 여자의 시이기에 ‘음탕한’ 남녀상열지사라고 폄훼했다.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을 도덕의 잣대로 사대부 귀족들의 눈에 맞춰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기를 즐기던 성리학자다운 편견이 반영된 평가다. 하지만 공자가 당시의 사람살이 풍경을 재편집할 리 만무하다. ‘모과’에 읊은 대로 고대의 청춘남녀들은 모종의 장소에서 여자가 ‘먼저’ 다 익은 열매를 마음에 든 남자에게 던져 연정을 표현하고, 남자가 이에 동의하면 선물을 주고 결혼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시 ‘표유매(?有梅)’도 그렇다.
“떨어지는 매실이여, 아직 일곱 개 매달렸네/ 날 찾는 남자여, 좋은 날 찾아오세요// 떨어지는 매실이여, 겨우 세 개만 남았네/ 날 찾는 남자여, 오늘 당장 찾아오세요// 매실이 다 떨어져 광주리에 주워 담았네/ 날 찾는 남자여, 결혼 약속만이라도 해주세요.”
‘최척전’에서 남자는 적극적, 여자는 수동적 공식 뒤엎어
고대에는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를 한 셈이다. 유학(儒學)이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동중서에 의해 국가이념이 된 이후 유가경전이 모든 이의 삶의 이정표가 됐는데,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보다 더 사랑의 풍속도가 유연하고 인간적이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물론 남녀의 사랑을 죄악시하던 중세에도 인간의 진솔한 감정을 중요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이지는 남녀의 애정을 노래한 민가(民歌)의 가치를 ‘공자’처럼 높이 평가했고, 청나라 소설가 풍몽룡은 사서오경(四書五經)보다 ‘정(情)의 문학’이 백성을 교화하는 도구로 더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의 시인 이옥(1760~1815)은 남녀상열지사에 만물의 이치가 다 들어 있다면서 사랑은 ‘인간과 세상을 살피는 창(窓)’이라고 했다.
또 먼저 불을 지피고 끝내 성취하는 쪽이 남자가 아닌 여자일 수도 있다는 작품도 있다. 조위한(1567~1649)이 광해군 13년(1621)에 쓴 전기소설 ‘최척전(崔陟傳)’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남자는 적극적, 여자는 수동적’이라는 (현대에도) 고정화된 사랑의 공식을 뒤엎는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최척은 정상사의 집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정상사의 집에는 어머니 심씨와 함께 피난살이를 하고 있던 옥영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창틈으로 몰래 최척을 엿보고 마음이 끌려 연애시 ‘표유매’의 마지막 구절을 써서 보낸다.
최척은 옥영의 마음을 알고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옥영의 어머니 심씨는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옥영은 야반도주할 각오로 맞서 약혼날짜를 받아내지만, 최척은 그만 호남 의병장 변사정의 막하로 참전하고 만다. 심씨는 최척이 혼례일이 돼도 돌아오지 않자 부잣집 아들인 양생을 사위로 맞으려 하나, 이번에도 옥영이 고집을 부려 그만둔다. 결국 최척이 돌아와 혼인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맏아들 몽석이 태어난 뒤 정유재란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남장을 하고 있던 옥영은 왜병 돈우에게 붙들려 포로가 되고, 최척은 흩어진 가족을 찾아 헤매다 명나라 장수 여유문과 형제의 의를 맺은 뒤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 건너가 살고, 몽석은 혜정스님에게 구출돼 남원 옛집에 살게 된다.
매부가 돼달라는 여유문의 요구를 거절한 최척은 여유문이 죽자 주우라는 사람을 만나 차(茶)상인이 돼 1600년 안남(安南·베트남)에 이른다. 이때 역시 안남에 정박해 있던 일본인 상선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오자 최척은 쓸쓸한 마음에 피리를 분다. 귀에 익은 가락을 들은 옥영은 자기 남편인 것을 알고 남편과 자신만이 아는 시를 외어, 둘은 극적으로 해후한다. 이들은 중국 항주에 정착해 둘째 아들 몽선을 낳아 기르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다 몽선이 장성하자 홍도라는 중국 여인과 혼인을 시킨다.
그런데 1618년 명나라의 요동정벌이 시작돼 최척은 아내, 아들과 이별하고 명나라 군사의 서기로 출전했다 청군의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에서 조선 강홍립의 군사로 출전했다 역시 청군의 포로가 된 맏아들 몽석을 기적적으로 만난다. 최척과 몽석은 귀국 도중 등창이 심했는데 은진에 숨어 살던 명나라 사람 진위경에게 침을 맞고 나아,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그를 데리고 남원에 와 부친과 장모를 모시고 몽석과 함께 살아간다. 한편 옥영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표류와 해적에게 배를 빼앗기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몽선과 홍도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일가와 해후한다. 그리고 홍도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했다 실종된 아버지 진위경을 만난다.
‘최척전’은 ‘임진록’ ‘박씨부인전’ ‘임경업전’ 등의 고전소설과 달리 민족영웅의 무용담은 없다. 단지 전란을 배경으로 한 동시대 한문소설인 권필의 ‘주생전(周生傳)’, 홍세태의 ‘김영철전(金英哲傳)’처럼 리얼리즘 기법을 써 백성의 고난과 역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옥영이라는 여주인공의 개성적 성격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옥영은 남성에게 기대는 수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모든 난관을 스스로 극복하는 슬기롭고 대담한, 심지어 최척에게 사랑을 먼저 고백할 정도로 ‘모던’한 여성이다.
‘남녀상열지사’ 자연스런 현상 공자도 인정
고전문학 연구자 조성진은 ‘춘향이가 읽은 연애소설’(앨피)에서 ‘최척전’은 최척 일가의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우연성에 기댄 기적적인 재회로 풀어나가는 중세 전기(傳奇)문학의 한계가 있지만, 둘째 아들 몽선의 반대에도 항해를 결행하는 옥영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은 ‘한 여인의 위대한 승리’라면서, ‘주체적인 여성’인 옥영의 사랑을 다룬 ‘최척전’은 한국의 고전소설이 ‘인현왕후전’ ‘계축일기’나 ‘춘향전’ 등처럼 단지 여성을 궁중에 갇힌 질투의 화신,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남성의존적 인물로만 다룬 게 아니라 다양하게 그렸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한다.
또 작품의 무대가 중국 일본 안남 등으로 확장된 만큼 최초의 ‘동아시아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외국인과의 결혼을 터부시하던 당시 시대상을 염두에 두면 우리의 고전문학 전통 속에는 ‘21세기 다문화 다민족’과 같은 선진성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원래 인간은 남녀 한 몸이었으나 오만한 죄로 제우스신이 두부처럼 두 동강을 낸 이후 나머지 반쪽을 찾고자 끊임없이 사랑을 한다고 했다. 남녀상열지사는 이렇게 신화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인간현상이기에 ‘유가(儒家)의 비조’인 공자도 동아시아 시가의 원류인 ‘시경’을 편집할 때 남녀상열지사의 시들을 따로 도려내는 ‘인위적 재난’을 벌이지 않았다. 시란 ‘사무사’이고 사랑은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