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설명하는 정창모 화백.
‘북한 최고의 풍경화가’로 불리는 정창모(76·사진) 인민예술가. 남쪽에서 흔히 부르는 ‘인민화가’라는 말은 사실 북쪽엔 없다. ‘인민예술가’가 정식 칭호다.
“최근 남쪽에서 북한 화가들의 그림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고 전하자 그는 “대부분 가짜입니다”라며 주의부터 줬다.
9월15일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당대저명화가 요청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온 정 화백을 전시회장에서 만났다. 정 화백이 남한 측 언론과 정식으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족 사업가이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위원인 이성일(51) 모드모아 회장이 주최한 이번 전시회에 북한 화가 40여 명이 32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 서울에서도 북한 화가들의 작품전을 열 계획이다.
다음은 정 화백과의 일문일답.
- 어떻게 그 작품들이 가짜인 줄 알 수 있나요.
“조국(북한) 화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팔지 않기 때문에 그림이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밖에서 보게 되는 작품들은 화가들이 지인에게 생일이나 환갑 같은 기념일에 준 선물이 유출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몇 점 안 됩니다. 따라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중국 옌지(延吉)와 투먼(圖們)에서 제 그림을 보고 그린 모조품입니다. 중국에 사는 교포와 남조선(한국)의 장사꾼들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진품 여부를 확인해간 사람은 신동훈 씨(조선미술협회 회장)가 유일합니다.”
북한 화가가 남한에서 팔리는 자신의 작품이 위작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그럼 지난해 남쪽에서 팔린 ‘남강의 겨울’도 가짜인가요.
“그 작품은 2005년 베이징국제예술박람회에 출품해 금상을 받은 것으로, 내가 주최 측에 선물했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남강의 겨울’은 그 작품이 유일합니다. 제가 비슷하게 그린 게 하나 더 있지만, 똑같이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작이 남한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했다. 북한 그림을 판매하는 한 회사는 지난해 ‘남강의 겨울’이 10여 점 창작됐고, 이 중 2점을 입수했다고 밝힌 바 있다.
- 최근 북한 그림이 세계에서 환영받고 있는데….
“올해 7월 영국 런던에서 우리의 그림 50여 점을 전시했는데,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일부 작품은 1만~2만 파운드(약 1890만~3780만원)까지 값이 나갔습니다.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도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대중 생활, 인간의 창조적인 생활을 진실되게 형상화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당시 유럽의 비평가들이 ‘조선화(동양화)는 독창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조선화에는 미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조선화는 민족의 전통 화법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동양화를 그리는 중국인들도 ‘조선화는 독특한 자기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 화백은 북한에서 최고로 꼽히는 ‘김일성상 계관인’ 화가다.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받은 화가는 40여 명의 인민예술가 가운데 5명뿐이다. 조각가까지 포함해 10명에 불과하다. 공훈예술가 역시 1000여 명의 미술가 동맹원 가운데 100여 명뿐이다.
- 지금까지 그린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1963년 제 처녀작이자 저를 출세시킨 작품인데요, 바로 김일성 수령께서 어촌마을에 오셔서 뱃머리에서 어구를 매만지는 어부를 만나는 그림입니다. 평론가들이 모두 위대한 수령의 고상한 덕성을 잘 형상화한 그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북한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가로 1.9m, 세로 1.2m로 100호 크기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의 대학 졸업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일약 북한의 ‘대스타 화가’로 떠오른다. 북한에서는 화가가 보통 5급에서 시작하는데, 그가 3급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작품 덕분이다(북한의 화가 등급은 1~5급으로 나뉘며, 1급이 가장 높다.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는 대부분 1급이다).
그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선전용 답변’이라는 생각에 작품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었다.
- 전시된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가 가리킨 작품은 가로 73cm, 세로 125cm의 ‘군사분계선의 옛 집터’였다. 거기에는 철조망 앞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방치된 항아리가 주둥아리만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뜻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1931년 12월16일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정 화백은 월북 화가다. 전주고를 졸업한 뒤 생활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평소 좌익 성향이 강했던 형의 영향을 받은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50년 가을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해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갔다. 함께 의용군으로 입대한 형은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뒤 평양의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사범대학 교원으로 잠시 활동하던 중 만수대 창작사로 발탁됐다.
조선화의 전통 기법인 몰골화법(윤곽선으로 형태를 표현하지 않고 먹이나 채색만을 사용해 그린 그림)의 대가인 정 화백은 현재 북한 최고의 풍경화가로 불린다. 그가 지금까지 그린 3500여 작품 가운데 100점은 국보로 평가돼 조선미술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국보적 가치를 지닌 우수작품도 400여 점에 이른다.
5남매 중 남쪽에서 살던 남동생은 2000년 뇌출혈로 사망했고, 두 여동생은 아직 남쪽에 살고 있다. 그는 2000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두 여동생을 만났지만, 지금은 서울에 산다는 사실만 알 뿐 연락처도 모른다.
- 앞으로 남쪽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은?
“우리는 이미 준비돼 있습니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언제든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 ‘여건’이 언제 허락될지는 그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