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현 씨의 작품 ‘네티즌’.
로마숫자 ‘Ⅱ’가 추가됐을 뿐 전시회 이름부터 똑같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작가의 대표작품도 지난해나 올해나 소화기로 만든 ‘펭귄’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펭귄 얼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뀐 것뿐이다. 물론 작가도 같은 작가다. 만화 ‘반쪽이’로 유명한 최정현 씨다.
전시 도록을 보면 더욱 연장전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도록에 실렸던 소설가 이윤기 씨의 추천글이 거의 그대로 올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전시와는 분명 뭔가 다르다. 지난해에는 보이지 않던 SK텔레콤, 한솔교육 등 대기업이 협찬하고 산림청이 전시를 후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주최가 바뀌었다. 지난해 전시 주최는 북촌미술관(관장 전윤수)이었지만 올해는 환경재단(대표 최열)이다. 뭔가 좀 이상하다.
같은 이름과 같은 작품 장소만 바꿔
‘반쪽이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이 기획저작권 침해 논란에 휩싸였다. 북촌미술관 측이 환경재단과 작가 최씨를 상대로 기획저작권 침해에 따른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북촌미술관 이승미 부관장은 “전시가 시작되기 한 달 전부터 환경재단 측에 지난해 우리가 했던 기획전과 같은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통보했지만 결국 전시를 했다”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전시저작권 침해를 중단하라는 내용증명을 우선 보냈다. 조만간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북촌미술관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특별기획전’으로 고물 자연사박물관 전시를 연 데는 이 부관장과 작가 최씨의 관계가 작용했다.
이 부관장에 따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2003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다른 미술관 기획자로 일하던 이 부관장이 우연히 최씨의 작품을 접하고 ‘유쾌한 상상 작업실 체험전’을 기획, 최씨를 참여시키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체험전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공개하는 기획전이었다.
“최씨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것이었다. 그 전시를 통해 최씨의 작품이 비로소 일반에게 알려졌다. 그때는 고물로 만든 작품이 거의 없었다. 최씨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을 더 만들어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을 열자고 제안했다. 작가는 고물이라는 단어가 싫다며 빼자고 했지만 내가 밀어붙였다.”
이 부관장은 이후 2005년 열린 전북도립미술관 기획전 ‘미술관 속 동물원’전 등 다른 기획전에도 최씨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해 초 이 부관장이 북촌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첫 번째로 추진한 기획전이 바로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이었다. 이 부관장은 환경재단 측에 공동주최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몇 차례 접촉 끝에 환경재단에서 300만원을 협찬받은 게 전부였다.
서울 인사동에 자리한 인사아트센터 입구에 ‘반쪽이의 고물 자연사박물관 Ⅱ’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난해 전시회 직후 평택 등 일부 지방에서 전시를 해달라고 요구해 지방순회전을 준비하려 했지만 작가가 거부했다. 지방에서는 당분간 전시를 하지 않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작품을 더 만들어 다시 전시할 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씨는 북촌미술관을 배제하고 환경재단과 손잡았다. 이에 대해 환경재단 측은 모든 책임을 최씨에게 돌린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 최연하 씨는 “최정현 씨가 전시를 하는데 도와달라고 해 북촌미술관과의 관계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지난해 전시를 끝으로 북촌미술관과는 모든 관계가 정리됐다고 답했다. 최열 대표가 작가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환경재단 측도 북촌미술관 측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에 대한 기획저작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최연하 씨는 “이 부관장이 기획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번 일로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제시한 전시협약서를 보면 지난해 전시에 대해서만 담고 있다. 부실한 계약으로 벌어진 일인 만큼 이 부관장과 작가, 양측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전시의 모든 것을 100% 작가가 결정하고 진행했다. 기획자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전시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씨의 의견은 어떨까. 전시기간에 인사아트센터 5층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 최정현 씨 “법적 문제 없어”
최씨는 북촌미술관과 체결한 전시협약서를 제시하며 “계약서에는 ‘최정현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으로 돼 있을 뿐 ‘반쪽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주장했다. ‘최정현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으로 돼 있던 것을 이번 전시에서는 자신이 ‘반쪽이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으로 바꿨다는 것. 따라서 ‘반쪽이의 고물 자연사박물관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데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씨는 또 “고물 자연사박물관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힌트를 얻어 이 부관장을 만나기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다 만들어놓은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을 뿐, 그 사람이 전시를 위해 만들어달라고 해서 (작품을) 만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부관장이나 북촌미술관에서는 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아무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 이는 이 부관장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씨는 이번 전시에 대해서는 “환경재단 측에서 먼저 제안해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환경재단 측 주장과도 다른 이야기다.
사실 그동안 국내 미술계에서는 ‘남의 기획 베끼기’가 적지 않았다. 다만 법적 분쟁으로까지 비화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미술계에 미칠 파장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전시기획자의 저작권은 어느 선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까.
법무법인 한결의 이동직 변호사는 “국내법상 판례가 많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시회 자체가 예술적인 표현방법이기 때문에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특히 이번처럼 같은 작품을 같은 이름과 방법으로 전시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어 “기획이나 아이디어는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아니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보호대상이다. 전시전 제목은 저작권법상 보호대상이 아니지만 부정경쟁방지법상 상호 혼용가치 침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사자간에 합의되지 않을 경우 사건은 법원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과연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릴지, 기획저작권과 관련한 사실상 첫 판례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