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의 원작 프랭크 밀러의 만화.
요즘 드라마와 영화 때문에 만화세계에 재입문하는 어른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흥행 영화 ‘300’을 보고 원작 만화를 찾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간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대체 이게 만화 맞아?”
밀러의 ‘300’ 화려한 색채 독특한 이야기
먼저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을 퇴근길 지하철에서 보려는 시도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웬만한 화집만큼 큰 판형에 와이드스크린처럼 가로로 넓은 화면을 펼쳤다간 사람들에게 눈총 받기 쉽다. 더 큰 문제는 그 압도적 화면, 화려한 색채, 독특한 이야기에 빠졌다가 종점까지 넋을 잃고 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
그의 또 다른 작품 ‘씬 시티’는 몸집만 좀 작을 뿐, 페이지 안의 독특한 세계는 더욱 심오한 경지로 나아간다. 왜 이렇게 낯설고도 충격적일까? 미국 만화라서? 아니다. 프랭크 밀러가 미국에서도 몇 안 되는 자기 고유의 서명(書名)을 가진, 무거운 울림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에나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주류 만화’가 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자기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 만화가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 인디, 얼터너티브, 예술주의 등으로 칭한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만화 독자들에게는 별종 취급을 받지만, 전 세계 고급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새로운 만화가 집단이 성장하고 있다. ‘작가주의 만화’의 신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제 우리 서점에서도 그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회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세련된 만화들이 넓은 시장을 형성해왔다. 영화 ‘제5원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뫼비우스를 비롯해 엔키 빌랄, 휴고 프라트 등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꾸준히 출간됐다. 최근 우리 독자들에게 좀더 주목받는 작가들은 선배들의 화려한 판타지가 사치스럽다는 듯 담담한 무채색으로 개인의 침잠한 내면을 그리는 젊은 세대다. 제이슨의 ‘헤이, 웨잇’은 어린 시절의 단짝친구가 죽자 갑자기 무기력한 어른으로 늙어버린 주인공을 그리고 있는데, 별다른 사건도 없이 슬픔을 표현해내는 놀라운 서정에 탄복하게 된다. 아르네 벨스토르프의 ‘8, 9, 10’ 역시 이런 경향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마쓰모토 다미요의 ‘철콘 근크리트’.
아르네 벨스토르프의 ‘8,9,10’
일본 작가주의 만화의 가장 역동적이고 강렬한 성취는 마쓰모토 다미요의 ‘핑퐁’ ‘하나오’ 등에서 확인해야 한다. 특히 곧 발간될 ‘철콘 근(筋)크리트’는 가상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두 소년의 모험담을 놀라운 앵글과 자유로운 그래피티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유럽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세계 작가주의 만화 시장의 새로운 에너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장경섭의 ‘그와의 짧은 동거’는 거대한 바퀴벌레와 살아가는 ‘장모씨’의 사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석정현의 ‘귀신’, 변기현의 ‘로또 블루스’ 등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만화출판사 카스테르망이 출간해 유럽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만화 전통은 물론, 유럽과 미국 만화의 장점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 한국의 작가주의 만화가 세계 만화의 새로운 얼굴이 될 날을 기대해본다. 물론 그들 만화의 재미를 가장 먼저 느낄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국의 스타일리스트 장경섭의 ‘그와의 짧은 동거’와 제이슨의 ‘헤이 웨잇’(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