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국화와 칼\'과 한글판 ‘요코 이야기’. 일제 말기 한국인들이 일본 여성들을 위협하고 강간을 일삼았다는 내용의 미국 중학교 교재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왼쪽부터).
- 최인훈 ‘회색인’, 건국대 2006 수시1
조선인 3000만명이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길” 바란 소설가 이광수. “일본이 못 가도 몇백 년은 갈 줄 알고, 살기 위해 친일”했다며 “친일도 부일도 아닌 다만 하늘의 순리에 따른”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고 자칭한 시인 서정주. 언어를 잘 다루는 작가 기질만큼이나 능란한 정치적 처세술의 달인인가, 아니면 순진한 문학인인가. 그러나 최인훈은 이를 ‘자발적 동조’에 대한 자기합리화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은 ‘가해자라기보다 피해자’라는 변명을 일삼는다는 비판을 곧잘 받는다. 가령 만화 ‘저녁뜸의 거리’는 원폭피해자 한국인이 왜 끌려왔는지, 영화 ‘간장 선생’은 감염을 증가시킨 원폭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한 어른들의 사악함과 무관심이 남매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에도 가해자로서의 일본인은 없다.
미국 중학교 교재로 쓰이는 소설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사태도 우선 가해와 피해의 비대칭적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1945년 8월15일 이후 조선인들이 일본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장면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뀌게’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한국 누리꾼들은 저자 요코 왓킨스(73)를 극우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로까지 내몰았다. 북한역사학학회는 “미국이 역사를 왜곡시킨 일본의 소설을 교재로 쓰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꿔놓은 반역사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요코 이야기’`에서 일본 소녀 요코는 군국주의 일본 패망 이후 밀려오는 역사의 격랑을 가냘픈 몸으로 헤쳐가야 한다. 그 이미지를 담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조영실 씨의 작품이다.
문제의 이 장면에서 한국인 독자들은 철없는 미국 아이들이 ‘불쌍한 일본인, 나쁜 한국인’이란 오해를 할 수 있다며 쌍심지를 켤 수 있다.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지구촌의 혈연들을 ‘애국적 한국인’으로 호명해, 미국 뉴저지주의 누구누구가 ‘일본인’에게 상처를 입으면 서울, 평양, 도쿄, 뉴욕에서도 상처받았다고 분개할 정도다.
“‘국사’는 특정 시기의 역사를 서술할 때마다 ‘민족의 철천지원수’ ‘절멸시켜야 할 적’의 존재를 명확히 설정한 뒤, 이런 원수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복종, 화합과 단결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있는데, 이런 대목에서 돋보이는 ‘상상 속의 적’은 역시 일본 제국주의다.”
-지수걸 ‘민족과 근대의 이중주’, 서강대 2006 수시2
물론 한국판 ‘요코 이야기’는 성폭행 부분이 간접적으로 두어 번 짧게 나오므로 지나친 대응은 국사교과서의 틀 안에 갇힌 ‘폐쇄적 민족주의’일 뿐이라는 지적도 많다. 요점은 일본 서민들도 전쟁의 희생자이고 반전 메시지가 전체 주제이기 때문에, 혐한(嫌韓)이 아닌 반전(反戰)소설이란 거다. 이렇게 편협한 민족주의를 경계하자(숙명여대 2006 정시)는 자성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울린 지는 꽤 됐다.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 이주노동자들이 피해를 당한 여수 화재참사, 10%대에 이른 국제결혼 등등의 사례만 봐도 지금은 다민족·다문화의 열린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의 공론인 시대다.
그래서 문학동네 측은 ‘저자의 아버지가 731부대의 고위간부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가 판명날 때까지 한국판 ‘요코 이야기’를 잠정적으로 판매 중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설사 아버지가 전범이더라도 딸이 직접적으로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딸에게 ‘중세식 연좌제’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연좌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일본 민족주의 동화 ‘우동 한 그릇’이 한국에서 스테디셀러가 된 현상을 ‘정신없는 한국인’탓으로 돌리는 논리와 얼추 비슷한 것이다. 작품에 대한 판단은 엄연히 독자의 몫이 아닌가. 그럼에도 ‘요코 이야기의 미국적 맥락’은 차원이 다를 듯싶다. 이야기(text)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고 가치중립적일 수 있지만, 특정 맥락(context)에 따라선 효과가 천양지차인 탓이다.
미국 학교에 소설 ‘요코 이야기’를 교재에서 제외해달라고 요구해 이를 관철한 수잔나 박 씨(위 왼쪽)와 딸 허보은 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던 김군자, 이용수 할머니와 네덜란드인 얀 뤼프 오헤르너 할머니(아래 왼쪽부터)가 2월15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 청문회에서 증언에 앞서 서로를 위로하듯 손을 꼭 붙잡고 있다.
“역사란 기본적으로 특정한 사람, 계급, 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경쟁적으로 과거의 해석을 자서전적으로 구성해내는 전쟁터이며 힘의 마당인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
-케이스 젠킨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중앙대 2006 수시1
표현 강도가 훨씬 강하다는 영어 원본에서 저자는 ‘용기와 생존의 자전적 실화’라고 밝힌 만큼 ‘요코 이야기’는 미적 장치(픽션)보다 역사적 사실성에 더 엄밀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미국 학생들에게 ‘일본인=피해자’ ‘한국인=가해자’라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반전 메시지를 담았더라도 교재로 쓰인 것은 무리”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폭력적, 선정적, 인종적인 출판물에 노출되지 않도록 청소년출판물은 미국 헌법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지 않던가.
태평양전쟁 당시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이 일본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선 ‘최고 A급 전범’(일본의 히틀러 격)인 쇼와천황(히로히토)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아라히토카미(現人神·살아 있는 신)’인 천황을 죽이면 일본인의 반발이 거센 탓이다. 연합국이 싸운 목적을 망각하는 꼴이라는 비판을 ‘타임’지가 제기하기도 했지만 베네딕트의 입김이 더 세, 결국 맥아더는 천황이 인간선언을 하는 대가로 그의 목숨과 천황 자리를 보장해준다. 베네딕트는 더 나아가 일본이 평화국가가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과연 그럴까?
“190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운동은 난징대학살과 종군위안부 문제를 국내외 반일세력을 위한 ‘날조’라고 주장하였다.”
-다카시다 데츠야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 이화여대 2007 수시1
일본의 진보적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쟁의 최고책임자인 쇼와천황이 도쿄재판에서 면죄부를 받은 ‘무책임성의 논리’를 결국 일본인들이 학습해, 일본을 병들게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 실질적 당사자는 ‘피와 살이 없는’ 무형의 국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시민 개개인의 몫인 게 현실이라는 ‘역설적 혜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코 이야기 역사논쟁은, 천황을 살려준 ‘국화와 칼’의 업보이기도 하다.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34일간 걸으며 반전반핵 평화운동을 편 ‘요코 이야기’(1986)의 저자가 종군위안부를 1996년에야 처음 알았다고 말한 2007년 1월 기자회견의 날, 미국 하원에서는 위안부청문회가 열렸다. ‘요코 이야기’는 ‘전쟁(남성)으로 인한 여성의 피해문제를 다룬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했던 저자가 20세기 가장 극악한 반인륜적 여성범죄의 실상을 몰랐다니, 이거야말로 서운함을 너머 일본(인)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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