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과 다산의 인연이 시작된 백련사.
혜장은 다산에게 차의 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한 승려다. 다산이 혜장을 만난 사연은 해남 대흥사에 있는 혜장선사 탑 비문에 나와 있다.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라 하는데 다산이 지은 글이다.
‘신유년(1801) 겨울에 나는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이후 5년이 지난 봄에 아암이 백련사에 와서 살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하루는 시골 노인의 안내를 받아 신분을 감춘 채 그를 찾아보았다. 한나절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작별하고 북암에 이르렀는데 해질 무렵 아암이 헐레벌떡 뒤쫓아와서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속이십니까? 공이 바로 정대부(丁大夫) 선생이 아니십니까? 빈도는 밤낮으로 공을 사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와 아암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밤새 차를 마시며 ‘주역’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혜장은 입에서 구슬이 구르듯, 물이 도도하게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과연 혜장은 일찍이 전남 해남의 대둔사(현 대흥사)로 출가하여 나이 30세에 두륜회(학승들의 학술대회)의 주맹(主盟)이 될 만큼 불교와 유교에 밝은 승려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혜장은 유학에서는 다산의 깊이를 넘어설 수 없었다. 밤이 늦어서야 혜장이 처량하게 탄식했다.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차 보내달라” 다산, 걸명시 지어
이때 혜장은 34세, 다산은 44세였는데 이후 두 사람은 다우(茶友)가 되어 자주 만난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동문 밖 시끄러운 노파의 밥집에서 조용한 고성암 요사(寮舍)로 옮겨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게 해줌으로써 혹독한 국문으로 생긴 지병이 낫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다산은 고성암 요사를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고 불렀다.
백련사 동백숲 안에 있는 이름 모를 고승의 부도
혜장의 호가 아암이 된 연유는 이렇다.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충고하자, 혜장이 그때부터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지어 부른 것이다. 혜장은 술병이 나 죽기 전 자신의 회한을 읊조린 시 한 편을 다산에게 보낸다.
백수(참선) 공부로 누가 깨달았나/ 연화세계는 이름만 들었네/ 외로운 노래는 늘 근심 속에서 나오고/ 맑은 눈물 으레 취한 뒤에 흐르네.
그는 죽을 무렵에 혼잣말로 ‘무단히(부질없이) 무단히’ 하고 중얼거렸고 한다. 교학에는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처에는 이르지 못한 자신의 삶이 부질없다는 회한이었으리라. 다산이 인정한 천재였음에도 술병이 나 40세에 요절한 혜장의 삶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