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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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는 문인에게도 술 내주던 시원시원한 멋쟁이 어머니”

국민 탤런트 최불암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5-02-03 1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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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없는 문인에게도 술 내주던 시원시원한 멋쟁이 어머니”
    1950~60년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명동’을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명동백작’의 배경으로, 돈 못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술을 내주기로 유명했던 ‘은성집’이 바로 그곳이다. 고 이명숙 여사가 운영했던 이 대폿집에는 천상병, 전혜린, 박인환, 김수영 등 당대 문화 예술인들이 몰려들어 얘기꽃을 피웠다.

    “우리 엄니는 폐허로 변한 명동에서 조그만 막걸리 대폿집을 운영했어. 명동바닥에서 ‘은성이 여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원시원하고 개성 넘치는 성격으로 유명했던 분이지.”

    ‘국민 탤런트’ 최불암씨(64)는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화려했던 명동에 대한 추억부터 끄집어낸다. 물론 최씨 모자가 낭만의 장소인 명동으로 흘러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최씨 나이 겨우 8세 때, 인천에서 영화사와 신문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집안 생계를 떠안아야 했던 젊은 어머니의 지독한 고생이 있었다. 그러나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던 외동아들의 머릿속에 어머니는 자신의 가장 근사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명동 예술가들의 대모로 기억된다.

    대폿집 하며 외아들 버팀목 역할 … 당시 명동 예술가들의 대모

    “기개가 남자보다 더 큰 분이셨어. 만날 외상술을 퍼주며 문인들을 다 먹여 살렸을 정도니까. 외상 장부가 박스 하나에 그득했는데 가난한 예술가들의 자존심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며 결국엔 가게 문 닫으면서 다 불태웠지.”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은성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이들은 당시 명동백작들의 애환을 달래준 속 깊은 여걸 은성이 여사의 팬클럽임을 자부하는 이들이다. 당시 어머니와 떨어져 고학을 했던 최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을 타러 명동에 가서는 수많은 문화 예술인을 만나며 장래의 연기자 꿈을 키워갔다.

    “엄니와 나는 사이가 참 좋았어. 그런데 외동아들에게 과도하게 집착을 보일 만도 하건만 내가 오히려 섭섭할 정도로 참견을 전혀 하지 않고 독립심을 길러줬지.”

    공부를 등한시하고 연극배우를 하겠다고 선언한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적극 지원해준 분 역시 어머니였다. 최씨의 어머니는 한 번도 아들에게 어떻게 살라거나 뭐가 되라는 식으로 요구하지 않았지만, 대신 한 발짝 떨어져서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곤 했다.

    “내가 맨 처음 연극을 한 날에는 직접 찾아와서 촌평을 해주며 격려해주셨지. 매번 그랬는데 특히 수사반장이 첫 방영된 날, 엄니께서는 ‘아무리 연기이고 가짜 형사라지만 그래도 사람에게 은팔찌(수갑) 채우고 총 겨누는 법 아니다’고 충고하셨지. 지금 생각해봐도 깜짝 놀랄 만한 멋진 생각인 것 같아.”

    71년 수사반장 첫 회에서 수갑을 채워본 그는 이후 종영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총이나 수갑을 쓰지 않고 고뇌를 거듭하는 형사 역을 그려내며 ‘배우 최불암’이란 이름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최씨의 어머니는 86년에 고인이 되셨다. 평생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지만 끝내 누구에게도 짐이 되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 초등학교만 나오셨지만 시와 예술을 이해하고, 아들의 잠재력을 멋지게 끌어낸 어머니를 떠올리는 최씨는 빙긋이 웃음만 내보인다.

    “한 가지 의문점은, 엄니가 나이를 자시더니 서서히 나에게 존칭 표현을 썼다는 거야. ‘식사는 했는가’ ‘다녀오시게’… 심성이 참으로 강한 양반이 그러니까 늙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돌아가실 때에는 완전하게 존댓말로 바뀌더군. 그게 어떤 뜻일까 많은 고민을 했는데, 아마도 내 아들을 매우 존경한다는 의미셨을 게야. 우리 엄니는…, 그렇게 멋진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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