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7일 오후 2시 서울 강북지역의 한 중소병원 응급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허름한 차림의 40대 남자가 의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자신을 김○○라고 밝힌 남자가 의사에게 요구하고 있는 주사제는 중독성이 강해 향정신성 의약품(마약류,이하 향정약품)으로 지정된 항(抗)불안제(신경안정제). 김씨는 자신의 ‘호소’가 먹히지 않자 숫제 의사를 협박하고 나선다. 그가 원하고 있는 주사제는 응급실에서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만 처방하는 약품으로 종종 도난사건이 발생하는 마약류 의약품이기도 하다.
“주사 안 놔주면 죽여버릴 거야. 난 하루도 그 약 없이는 못 살아. 나를 이렇게 만든 ××들이 누군데.”
중독자, 병원 찾아와 “약 내놔라” 소란
난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우던 그가 조용해진 것은 평소 잘 아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나이가 나타나면서부터. 사나이가 그에게 귓속말을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의사와 간호사를 뒤로하고 응급실 문을 나섰다.
김씨가 급하게 5만원을 내놓자, 사나이는 작은 약봉지를 바로 건넨다. 약봉지에 든 내용물은 바로 경구용(먹는) 항불안제. 의학적으로 불안증과 우울증 치료에 쓰이는 항불안제는 중독성이 강해 대부분 향정약품으로 지정된 약품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약봉지 속엔 항불안제 중에서도 중독성이 큰 벤조디아제핀계(벤조계) 약품이 종류별로 20알이나 들어 있었다. 의사를 죽일 듯이 날뛰던 남자가 조용해진 이유는 주사제 대신 경구용 항불안제를 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독약물의 처방에 앞서 환자에게 약의 부작용을 설명하고 있는 의사.
김씨가 노숙인으로 전락한 때도 이런 중독 증세 때문에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뒤였다. 10년 전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으로 동네 의원에서 항불안제가 든 약을 계속 처방받은 뒤 그 약에 중독돼버린 것이다. 정신과의원에 가면 잡아 가두려고만 해서 그는 결국 노숙인 생활을 시작했다. 일용직 노무자가 된 그는 돈을 벌면 밥보다 먼저 항불안제를 사서 먹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병원 응급실을 찾아가 횡포를 부렸다. 약을 먹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에겐 항상 밥보다 약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중소병원 응급실에는 항불안제를 찾는 약물 중독자가 꼭 한두 명씩은 있는 게 현실이다.
약물 중독자들이 유난히 많은 서울 남산 쪽방촌. 요즘 이곳에는 향정신성 의약품 판매상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렇듯 어떤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도리어 마약류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약물로도 사용이 금지된 필로폰이나 암페타민과 달리, 항불안제는 어디서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마약류인 데다 그 피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중독자들의 피해 사례가 수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무관심 속에 단 하루도 중독성 항불안제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렇듯 중독성 항불안제의 수요가 많아지다 보니 이들 약물을 대량으로 수집해 중독자들에게 비싼 값으로 되파는 ‘수집상’들이 생겨나고 있다.
김씨에게 약물을 준 사나이가 바로 그 ‘수집상’으로 언뜻 보기에도 수천개의 약을 가지고 다니며 병원 응급실에서 약을 팔고 있었다. 싼 것은 5원, 비싼 것은 기껏해야 300원 하는 약을 한 알에 2500원씩에 팔고 있는 것.
중독자들 노린 뜨내기 약장수들도 등장
2005년 1월11일 밤 10시 서울 남산 인근의 일명 ‘쪽방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 10시만 되면 찾아오는 ‘약장수’ 김모씨는 그날도 쪽방촌 한구석에서 ‘기분 좋아지는 약’ 또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약을 한 알에 500원씩 팔고 있었다. 정체 모를 김씨의 약은 약효가 워낙 좋아 언제나 인기폭발,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김씨에게 약을 사 확인해보니 바로 향정약품인 중독성 항불안제들이었다. 그는 “이 약만 먹으면 통증이나 아픔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며 “이곳 사람들 중엔 하루라도 이 약을 안 먹으면 사지를 떠는 사람도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에게 이 약이 무슨 약인지 아느냐고 묻자 “고급 병원에서 주는 비싼 약”이라며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김씨에게 매일 이 약을 받아먹고 있는 김모 할머니(65)는 이 약의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약 몹쓸 약이지. 15년 전쯤 신림동(서울 관악구)에 살 때 배가 아파 동네 병원에서 주는 약을 다섯 달 동안 먹었는데 항상 같은 약을 주더라고. 신경성 위염에 쓰는 약이라고 해서 계속 먹었는데 어느 날 약을 끊었더니 잠이 안 오기 시작하더군. 사지가 벌벌 떨리고, 속은 예전보다 더 아프고 그랬어. 얼마나 한기(寒氣)가 드는지. 여름에 이불을 둘둘 감고 있어도 추위를 느낄 정도였지.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어. 병원을 찾아가 따져 물었더니 똑같은 약을 주면서 계속해서 먹으면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결국 괜찮기는커녕 그 약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살아갈 지경이 된 거지. 거기다 신림동이 개발되면서 쪽방으로 쫓겨온 후 몇 달 동안에는 그 약을 구하지 못해 진짜 죽지 못해 살았어. 쪽방에서 하루 자는 데 2000원인데 500원을 약 사는 데 쓰는 이유가 따로 있나….”
환자 가장한 기자에게도 가는 곳마다 ‘항불안제’ 처방
약장수 김씨에게 그 약을 어떻게 구하느냐고 묻자 “아무 병·의원에나 들어가서 신경을 좀 쓰면 속이 아프고 설사가 난다거나 스트레스가 쌓여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하면 일주일치 약을 받아낼 수 있다”며 “고혈압 환자나 당뇨 환자는 한 달치 약은 기본이고 재수 좋으면 두 달치 약도 구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는 한술 더 떠 “정신과에 가서 무조건 불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면 2주일치도 그냥 준다”며 “내과나 정형외과 쪽에 가면 쓸데없는 검사를 받으라고 할 확률이 있기 때문에 정신과가 더 편할 것”이라고 충고까지 해줬다. 그는 서울 지역을 100여개의 권역으로 나눠, 하루 10곳 이상의 병·의원을 돌아다니며 ‘항불안제 쇼핑’을 하고 있었다. 하루 1개 권역만 돌아다니므로 같은 의원을 다시 방문하기까지는 100일이 걸리는 셈이다.
수술할 때 진통제로 쓰이는 누바인. 항불안제도 중독되면 누바인과 같은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다음으로 배가 아프다며 내과의원 3군데를 방문해 “내시경 검사에 이상이 없는데 신경만 쓰면 속이 쓰리고 아프다”고 증상을 열거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위염 치료제 몇 가지와 함께 영락없이 중독성이 강한 항불안제가 처방됐다. 역시 향정약품에 대한 안내나 복약 지도는 없었다. 이중 한 곳은 중독성이 강한 항불안제를 두 개씩 처방해주었다. 정형외과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신경만 쓰면 어깨가 결리고 아프다”고 하자 영락없이 중독성 항불안제 처방이 그대로 나왔다. 3일간 기자가 모은 중독성 항불안제는 수집상에게서 산 것과 합쳐 모두 520정.
문제는 이렇듯, 중독성 항불안제가 정신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신경정신과보다 다른 과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제약사 관계자는 “중독성 항불안제 중 60%가 신경정신과가 아닌 타과에서 소비되고 있다”며 “고혈압, 만성위염, 위궤양, 고지혈증, 십이지장궤양, 대장염, 골다공증, 갱년기 장애와 같은 만성 질환에 이들 약물이 함께 처방됨으로써 환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약물에 중독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심지어 기침이 심한 아이에게 불안감을 없애준다며 소아과에서조차 중독성 약물을 쓰고, 허리나 다리 통증을 호소하는 만성통증 환자들에게까지 장기적으로 중독성 항불안제가 마음대로 쓰이고 있는 실정.
주간동아가 입수한 서울지역 한 동네 약국의 조제자료와 처방전을 보면 그 심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변에 가정의학과와 정형외과 의원이 있는 한 약국에서 2004년 한 해 동안의 중독성 항불안제 조제자료를 뽑아보았더니 두 곳 의원은 1년 동안 무려 60일이나 중독성 항불안제를 처방했고 처방 수량만 955정에 달했다. 이중 하루에 120알이 처방된 날도 3일이나 됐다. 하루 2알씩 먹는다 해도 두 달치가 한꺼번에 처방된 셈이다. 이 동네 약국 김모 약사는 “환자들에게 향정약품이 들어가 있다고 말하고, 오래 복용하면 안 된다고 복약 지도를 하고 싶지만 의사에게서 거래 약국을 다른 곳으로 바꾼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며 “길게는 10년씩 중독성 항불안제를 계속 먹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항불안제 중독 땐 수면장애 등 신체 각종 부작용
이런 무더기 처방은 각 의원의 처방전에서도 확인된다. 서울 지역 K정형외과는 단순 관절염 환자에게 2개월분 항불안제를 한꺼번에 처방했는가 하면, A내과는 고혈압 환자에게 6개월분 항불안제를 3회에 걸쳐 처방하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항불안제이지만 남용의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참하다. 술(알코올)과 같이 중추신경을 억제해 불안감이나 우울감을 사라지게 하는 중독성 항불안제들은 심하면 타살이나 자살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폐인이 돼서야 결국 자신이 약물 중독자임을 깨닫지만 이미 약물을 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심지어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치료하다 도리어 약물중독 환자가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폐인이 된 경우도 있다. 이미현씨(33·가명)가 바로 그런 경우.
주간동아가 입수한 각종 처방전과 약들.
이런 현실에도 중독성 항불안제를 남발하는 의사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 항불안제 처방 여부는 의사의 고유 권한인 까닭에 누구도 뭐라고 간섭할 수 없는 상황. 가톨릭대학교 성가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한국중독정신의학회 총무이사)는 “벤조계 항불안제는 알코올과 비슷한 약물로 금단 증세가 나타나지만 아무리 의존성이 강한 약물이라도 전문가가 컨트롤만 잘하면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즉 전문가의 윤리성이 문제이지 약물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법적으로도 하자가 없다는 이야기다.
중독약품을 사러 쇼핑을 다니는 수집상들을 잡아낼 방법도 없다. 병원 간, 약국간 정보교환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데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항불안제에 대해 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까닭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같은 기관에서 잡아내기도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의대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오강섭 교수는 “벤조계 약물의 금단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는 현실에서 약을 모아서 파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짓이다. 중독성도 문제지만 타살, 자살 등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중독성 항불안제가 있지만 벤조계 약물보다 치료 효과가 늦고 근육이완 등의 효과가 적어 벤조계 약물이 아직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한 관계자는 “의사들의 항불안제 처방 패턴과 환자에게 고지를 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중독성 항불안제 수집상에 대해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단속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만약 신경성, 스트레스성 질환이 있는 환자들이라면 비록 감기에 걸려 병의원에 갔다 하더라도 처방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향정약품이 포함돼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당신도 약물중독 환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