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오후8시 평택시 팽성읍 촛불행사장에서 마을 주민들이 촛불을 켜 들고 \'미군기지 확장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다.
11월11일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가을걷이가 끝난 논 위로 샛노란 깃발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해오는 데 반대하는 주민들이 세워놓은 것이다.
이 지역 논들은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평택의 캠프 험프리(K-6) 기지가 확대되면 모두 수용당할 땅. 그러나 농민들이 ‘죽으면 죽었지 땅은 주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어 아직 기지 이전을 위한 측량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다. 황금빛 벼 이삭 대신 샛노란 깃발이 출렁이는 들판은, 경기 남부 일대에서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고 해서 대추리(大秋里)라는 이름이 붙은 이 평온한 시골 마을이 어느새 살풍경한 싸움터로 변해버렸음을 묵묵히 보여주는 듯했다.
올 8월 정부가 대추리를 포함한 평택 일대 349만평의 땅에 미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지역민들의 저항이 이처럼 강경할 것이라고 내다본 이는 많지 않았다. 매입 대상 토지 대부분이 농지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현지 주민들에게 충분한 보상만 해주면 곧 토지를 매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측이 현재로서는 완전히 빗나간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농민들은 ‘한 푼도 필요 없다. 땅만 가져가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농민들이 농기구 등으로 만들어 세워놓은 '미군기지 확장 반대' 설치물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예요. 왜정 때는 일본놈들이 비행장 만든다고 쫓아냈고, 해방 되니까 미국놈들이 활주로 새로 놓는다고 몰아냈지요. 간신히 살 만해지니까 이제는 또 미국놈 들인다고 나가라고요? 무지랭이 농민이라고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다시는 내 땅 못 내놓습니다. 절대 포기 안 해요.”(대추리 주민 신병근씨)
미군기지 이전 이야기가 나오자 신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땅은 단순한 농토가 아니라,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팽성읍 일대 농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1952년 이 지역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원래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왔던 이들. 지역민들이 ‘구(舊)대추리’라고 부르는 지역에 캠프 험프리(K-6) 기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버려야 했다. 노인들은 아직도 그날의 일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막 쫓겨나오고 난 다음날 눈이 내렸으니 아마 11월이었을 거예요. 집에 있는데 갑자기 미군들이 천막과 합판 한 장 주면서 나가라는 겁니다. 남편은 군에 갔고 한 살배기 큰아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어요. 가재도구만 챙겨 부랴부랴 나왔더니 불도저로 집을 밀어내더라고요.”
미군기지 수용이 예정돼 있는 평택시 팽성읍 마을 곳곳에는 반대의 뜻을 밝히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황무지 개척해 일군 고향땅 ‘애착 각별’
“평택에 미군기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신문 보고 알았어요. 용산에서 미군을 빼내기만 하면 무조건 선(善)입니까. 여기도 사람 사는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 의견 묻는 공청회나 여론조사, 투표 같은 거 한 번도 없었어요. 이게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미군기지 평택 이전은 원천 무효입니다.”(대추리 주민 송태경씨)
정부가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반발에 당황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 지역의 내력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1월5일 현지 측량 작업을 벌인 국방부 현장 조사단은 주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기지 수용에 반대하며 토지 측량을 막는 주민들과 경찰이 물리적 충돌을 벌여 60, 70대 노인들과 부녀자들까지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이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정태화씨는 이날 경찰에 붙잡혀 ‘닭장차’에 실린 채 4시간이나 떨어진 용인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내가 남의 땅에 함부로 들어갔습니까, 남의 땅을 빼앗겠다고 했습니까. 내 땅 내가 지키겠다는데, 왜 범죄자 취급을 해요? 용인까지 데려간 것도 아무 이유 없어요. 괜히 노인네들 겁먹으라고 그런 거지. 그게 정부예요? 이게 공권력입니까?”
정씨는 아직 분을 다 삭이지 못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8년 전 이 지역으로 시집 와 아흔둘 된 시할머니와 일흔의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는 김모씨는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젊은이는 그대로 따르는 게 농촌이다. 내 땅 지키겠다고 나간 어른들을 경찰이 밟고 때리는 걸 보고는, 땅 팔고 나갈까 하던 젊은 사람들까지 ‘그래, 나도 죽여라’ 하는 심정이 됐다”고 말했다.
“우리 시할아버지가 고향 땅에서 쫓겨난 뒤 손가락 잘려가며 일군 땅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고생 끝에 황무지를 문전옥답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이제 와서 막무가내로 빼앗으려고 하니 누군들 열받지 않겠습니까.”(김모씨)
미군을 위한 상권이 형성돼 있는 거리에는 '미8군 이전 주둔 절대지지'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 농민들은 매일 저녁, 대추리 팽성대책위 사무실 앞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한 ‘촛불 행사’를 연다. 70일째 계속되고 있는 ‘촛불 행사’에 참가하는 농민 가운데 대다수도 노인들이다. 11월11일 오후 7시, 70일째 이어지고 있는 촛불 행사장을 찾았을 때 참가자들은 무반주로 ‘나의 고향’을 개사한 ‘내가 사는 고향은 기름진 벌판/ 도두리들 흥농계들 신대리 들판/ 매년마다 풍년 되어 살기 좋은 곳/ 대대손손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등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들의 모임이 ‘행사’인 것은 젊은이들이 이끌어가는 일반적인 ‘촛불 집회’와 달리 어떤 정치적 구호도 없는, 일종의 ‘반상회’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난 뒤 ‘아름다운 고향을 빼앗아가려는’ 정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자 한 주민은 “우리는 미국 싫어하지 않아요. 지금 있는 미군보고 나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괜히 정부가 땅을 내놓으라고 해서 평범한 사람들 미국 싫어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이 농민들을 부추겨 ‘반미감정’을 생기게 하고, 그래서 이들이 토지 매수에 반대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는 얘기였다.
최근 들어 정부 일각에서 ‘평택이 제2의 부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들의 이 ‘순수함’ 때문이다.
수용지역 주변 주민들은 미군 이전 환영
물론 이에 대해 국방부는 “‘평택’과 ‘부안’은 전혀 다르다”는 태도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문제가 된 전북 부안의 경우 제3의 방안을 찾을 여지가 있었지만, 미군기지 이전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게다가 미군기지는 혐오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수 시민들이 부대 이전을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평택 전체의 여론은 대추리, 도두리, 신내리 등 이들 농촌 지역과 차이가 난다. 미군을 위한 상권이 형성돼 있는 안정리에는 ‘We love US Military(우리는 미군을 사랑합니다)’와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고,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당근’으로 제시된 평택 국제도시 건설 등이 땅값 상승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은근히 기지 이전을 기대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기지가 들어서야 할 대추리, 서탄면 일대 주민들이 “우리가 땅을 내놓지 않으면 미군은 못 들어온다. 우린 끝까지 버틸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땅을 파는 이 가운데 주택소유자와 세입자에게 가구당 1500만원의 이주정착 지원금과 1000만원까지의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고, 개발 이익이 예상되는 지역에 택지를 개발해 공급토록 할 계획이지만, 주민들은 “농사꾼은 땅 파먹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장사해봤자 돈만 날리고 타향에서 외롭게 죽게 될 것”이라며 막무가내다.
그래서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 토지 매입에 나선 한국토지공사(대추리 담당)와 한국감정원(서탄면 담당) 등은 매입 대상 지역에 토지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들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매입 대상 토지의 지주 가운데 60% 이상의 부재 지주들은 ‘땅’보다 ‘보상금’을 따를 것이고, 그렇게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결국 남은 지주들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강제 수용을 통해서라도 내년 말까지는 토지 매수를 끝내겠다는 것이 정부 측 계획. 평택이 ‘제2의 부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전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농민들은 일제와 미군에 의해,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뽑은 정부에 의해 세 번이나 강제로 고향을 빼앗기게 된다.
“평택과 부안은 상황이 다릅니다. 부안은 자치단체와 주민들이 나서 시설유치를 원했다가 내부적인 갈등을 겪은 것이지만, 평택은 정부와 미군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민심이 반발하는 겁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정부는 정당성만 잃게 될 것이고,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겁니다. 농민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김지태 팽성대책위 위원장의 경고다. 평택은 과연 제2의 부안이 될 것인가.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