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사법독재’를 꿈꾸는가, 아니면 헌법의 유일한 수호자인가.
‘관습’ 혁명의 주인공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정부 여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단 한 번의 결정으로 무력화하며, 시쳇말로 ‘가장 뜨는’ 권력기관이 됐다. 지난해 구태 정치인을 상대로 매서운 사정의 칼을 휘두른 ‘검찰 열풍’과 자못 유사한 분위기다. 헌재는 ‘사법독재’라는 극단적 비난과 ‘헌법수호’라는 칭송이 엇갈리는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그 와중에 권력을 좇는 폭주하는 민원(民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는 급증한 ‘헌법소원’ 통계에서 미약하게나마 입증된다. 올 9월까지 헌재에 접수된 헌법소원은 모두 873건으로 2002년과 2003년에 비해 각각 11%와 18% 이상씩 증가한 것. 이는 올 3월부터 시작된 대통령 탄핵사건의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당시 탄핵 때만 해도 헌재에 대해 미심쩍어하던 여론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위헌으로 결론 나자 폭발하기 시작, 9명의 헌재 재판관들을 대통령과 직접 대적할 수 있는 실질적 정치권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혁 입법에 대한 최종 심판권자 역을 주문하고 나선 것이다.
종부세·사학법 헌법소원 준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발표한 ‘부동산보유세 개편안’에 대한 반응은 변화한 권력 관계를 내비쳐 흥미롭다. 새로 도입될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한나라당 등 야당이 “‘강남세’나 ‘수도권세’에 불과하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지만,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종합부동산세가 국세로 제정될 경우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며 초장부터 야당은 배제하고 무작정 헌재로 발길을 돌린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낯선 풍경이다.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개정 사립학교법’ 역시 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여당의 개혁안에 대해 1600여 사립학교 이사장들은 극렬 저항하며 “이석연 변호사와 대학교수, 로펌의 전문가들이 개정안에 위헌 요소가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밖에도 헌재에 제기된 각종 소송들은 하나같이 폭발성을 안고 있는 민감한 사안들이다. ‘성매매’나 ‘호주제’ 같은 문제에서부터 사적인 한풀이 민원까지, 당분간 헌재는 정치의 중심에 서리라는 전망이다.
헌재는 계속되는 헌재 반대 집회에 대한 경찰 경호나 경비 제의를 거부하며, 담담하게 폭주하는 소송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헌재 밖의 대다수 법관들은 공개적으로 ‘관습헌법’ 논란에 대해 뚜렷한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현직 판사인 나도 배우지 못한 이론” 혹은 “헌재의 판결이 성역일 수는 없다”는 강경 태도도 적지 않으나, “자업자득이다”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의견 소통이 비교적 자유로운 법원 내부통신망에서조차도 ‘관습헌법’에 대해서는 단 한 건의 의견도 개진되지 않고 있는 것.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소장판사는 그 이유에 대해 “혼란에 혼란을 더할 우려가 있어 판사들이 자제하고 있을 따름이다”고 말한다. 진보적 법관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의 한 판사는 “헌재는 국민의 대다수가 ‘수도 서울=관습헌법’이란 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음에도 결국 헌법에 편입시켰다”며 “판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교적 솔직하게 법조계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사립학교법 개정 논란도 헌재까지 갈 것으로 보인다.
현직 판사들의 가장 큰 불만은 헌정 역사 50년에 불과한 성문헌법 국가에서 ‘관습헌법’ 논란이 불거짐으로 인해 초래된 헌법 해석의 혼란에 집중된다. 판사들은 “충돌하는 헌법가치에 대한 해석에 주력해야 할 헌재가 ‘관습 헌법’을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사법부의 모든 판결이 다시 헌재에서 논의돼야 하는 심각한 사법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며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판사 사회가 ‘불난 집’이라면 논의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검찰은 어떤 상황일까. ‘헌재’와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검찰이지만 정치권과 헌재의 갈등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운 상황이다. 그 이유는 그간 ‘불문율’로 인정받았던 2명의 검찰 출신 헌재 재판관 발탁에 불똥이 떨어졌기 때문. 1989년 헌재 출범 이후 그동안 총 28명의 헌재 재판관 중 6명이 검사 출신이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대검 공안부장을 거친 공안통이었다. 헌재 재판관은 ‘대법관’과 동격으로, 이제껏 검찰은 헌재 재판관을 주요한 승진 통로로 활용해온 것. 그러나 갈수록 공안검사 위상이 약해지고, 그 공백을 재야법조 인사들이 채우게 될 경우 검찰의 헌재 진출은 힘겨워질 전망이다.
정치권에서는 헌재 재판관의 ‘민주적 정당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다. 학계에서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6명의 헌재 재판관에 대한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자마자, 즉각 여당은 국회청문회 도입안을 들고 나와 파문을 키웠다. 이 같은 여권의 움직임에 대해 “자칫 헌재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비칠 수 있다”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러나 헌재가 갖고 있는 약점들, 즉 전무한 헌법전문가, 재야 법조계 인사 배제, 대법관 수준의 국회동의 문제 등에 대한 논의가 뒤따랐기 때문에, 2006년 9월 제4기 헌재 출범 이전까지는 현행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 수준의 헌재 재판관 추천위원회가 조직될 전망이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 이후 헌재 재판관들은 여권과 충청도 주민들의 탄핵 여론에 시달려야 했다. 상경 시위와 함께 일각에서는 헌재 결정에 대한 재판관들의 회의록 녹취록 등 일체의 자료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 요구도 제기됐다. 부담을 느낀 헌재는 최근 헌재 연구관 등 소속 공무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상황이다. 당분간 쏟아지는 소송에 전념하며 여론의 추이를 살필 전망이다.
한 전직 고위법관은 기자들에게 “이 판결은 당장 대법원에 가면 위헌판결을 받을 것이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어 “나도 수도 이전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헌재가 ‘관습헌법’을 바꾸는 데 헌법 개정을 요구한 세계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판례는 두고두고 헌재에 부담이 될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헌재는 당분간 세간의 뜨거운 관심 속에 ‘관습헌법’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하는 과제까지 떠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