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일이라 조금 얼떨떨합니다. 대학 총장직을 그만두고 ‘세계화+한국화 전도사’로 나선 지 이제 겨우 두 해가 지났을 뿐인데…. 한국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세계화는 없다는 소신으로 일해온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한라대 총장을 지낸 이창훈 베올리아워터코리아 최고경영자(CEO·한라대 명예총장·50)가 10월15일 프랑스 국가최고훈장인 레종도뇌르를 받았다. 한국과 프랑스 간 경제 교류에 이바지한 공로로 기업경영자 부문에서 서훈자로 결정된 것. 그는 2002년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물 관리 전문기업 베올리아워터의 한국담당 CEO를 맡아왔다.
“칭기즈칸은 훈장으로 부적을 부하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샤머니즘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칭기즈칸의 부적은 놀랍게도 병사들에게 용기와 대담함을 주었다고 해요. 부적을 받은 사람은 불사신이 된다는 말에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다 죽곤 했답니다. 레종도뇌르가 앞으로 내 일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프랑스와의 인연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는 파리10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8년부터 한남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0년 한라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상아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
한국에서 대학 총장은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그는 임기를 2년 2개월이나 남겨놓고 대학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남들이 다 좋다는 자리’를 더 못해먹겠다고 사표를 내던진 것. 2002년 8월 “사립학교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총장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기고 대학을 떠났다.
“46살에 총장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었지요. 재단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허수아비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학법인이 공공재인 대학을 좌지우지하는 환경에서 총장을 계속 맡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베올리아워터코리아다. 프랑스 기업과 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다. 한국과 프랑스를 모두 이해하는 경영자가 필요했던 베올리아워터는 “총장을 역임한 경력이니 경영 마인드도 갖추고 있다”면서 그를 한국 법인 CEO로 선임했다. 대학 총장 출신이 외국계 기업의 CEO를 맡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100년 전이었다면 매판자본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들었을 겁니다. 21세기 탈냉전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경제 전쟁과 블록화에 기반한 세계화예요. 정치 논리에 빠져 있던 오스트리아가 몰락하고 프로이센이 득세한 역사를 알고 있을 겁니다. 세계화에서 뒤처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는 요즘 끼니때의 요릿집처럼 바쁘다. 오전엔 원장을 맡고 있는 아셈연구원에서 학문과 관련된 일을, 오후엔 베올리아워터코리아 사무실에서 회사 일을 한다. 틈틈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 그는 “한국화를 통한 세계화가 곧 국익이라는 소신을 실현해나가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한라대 총장을 지낸 이창훈 베올리아워터코리아 최고경영자(CEO·한라대 명예총장·50)가 10월15일 프랑스 국가최고훈장인 레종도뇌르를 받았다. 한국과 프랑스 간 경제 교류에 이바지한 공로로 기업경영자 부문에서 서훈자로 결정된 것. 그는 2002년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물 관리 전문기업 베올리아워터의 한국담당 CEO를 맡아왔다.
“칭기즈칸은 훈장으로 부적을 부하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샤머니즘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칭기즈칸의 부적은 놀랍게도 병사들에게 용기와 대담함을 주었다고 해요. 부적을 받은 사람은 불사신이 된다는 말에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다 죽곤 했답니다. 레종도뇌르가 앞으로 내 일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프랑스와의 인연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는 파리10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8년부터 한남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0년 한라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상아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
한국에서 대학 총장은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그는 임기를 2년 2개월이나 남겨놓고 대학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남들이 다 좋다는 자리’를 더 못해먹겠다고 사표를 내던진 것. 2002년 8월 “사립학교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총장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기고 대학을 떠났다.
“46살에 총장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었지요. 재단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허수아비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학법인이 공공재인 대학을 좌지우지하는 환경에서 총장을 계속 맡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베올리아워터코리아다. 프랑스 기업과 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다. 한국과 프랑스를 모두 이해하는 경영자가 필요했던 베올리아워터는 “총장을 역임한 경력이니 경영 마인드도 갖추고 있다”면서 그를 한국 법인 CEO로 선임했다. 대학 총장 출신이 외국계 기업의 CEO를 맡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100년 전이었다면 매판자본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들었을 겁니다. 21세기 탈냉전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경제 전쟁과 블록화에 기반한 세계화예요. 정치 논리에 빠져 있던 오스트리아가 몰락하고 프로이센이 득세한 역사를 알고 있을 겁니다. 세계화에서 뒤처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는 요즘 끼니때의 요릿집처럼 바쁘다. 오전엔 원장을 맡고 있는 아셈연구원에서 학문과 관련된 일을, 오후엔 베올리아워터코리아 사무실에서 회사 일을 한다. 틈틈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 그는 “한국화를 통한 세계화가 곧 국익이라는 소신을 실현해나가겠다”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