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쓸 만한 일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준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척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이런 이야기를 상대방의 귀에 대고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건 한심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조차 마이클 무어와 ‘화씨 9/11’에 대한 토의가 동등한 지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의 가치 있는 토론으로 흘러가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한쪽에서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큐멘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화씨 9/11’은 시끄럽고 야비하고 뻔뻔스러우며 노골적인 악의와 분노를 품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목적 역시 그런 성격과 잘 어울린다. ‘화씨 9/11’의 의도는 현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모욕하고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지 폭로한 뒤 곧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보여주는 이집트 관광 다큐멘터리와 성격 자체가 다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보다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는 왜 싸우는가’나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에 가깝다. ‘화씨 9/11’은 당당하고 숨기는 게 없는 정치선전 영화다.
영화는 무어 특유의 야유로 시작한다. 무어는 온갖 코미디 도구들을 동원해 미심쩍은 선거로 당선된 부시의 무능력함과 게으름을 놀려댄다. 일단 관객들이 무어의 조롱에 익숙해지면,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비판의 문을 여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부시 일가족과 빈 라덴 가족의 밀착관계다. 물론 이 영화는 PD수첩이 아니므로 엄청난 적수여야 할 것 같은 두 가족의 밀착관계를 폭로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의 소재는 폭로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부시가 내세웠던 모든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열쇠다.
여기서부터 무어는 이라크 전쟁의 현장에서부터 자신의 고향 플린트를 오가며 얼마나 끔찍한 인권 유린이 일어나고 있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농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평범한 노동자 계급의 아줌마 라일라 보스콤의 서글픈 초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화씨 9/11’이 영화 예술가 무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로저와 나’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볼 수 있었던 자극적인 위트나 현란한 논리의 비약은 ‘화씨 9/11’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전작들과 달리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철저한 사실 검증을 거쳤고 논리 역시 비약 없이 잘 정돈돼 있다. 무어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어의 제1 목표가 걸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화씨 9/11’은 부시를 향한 전쟁의 제1 무기 이상은 아니다. 그의 무기가 과연 이번 선거에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척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이런 이야기를 상대방의 귀에 대고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건 한심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조차 마이클 무어와 ‘화씨 9/11’에 대한 토의가 동등한 지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의 가치 있는 토론으로 흘러가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한쪽에서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큐멘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화씨 9/11’은 시끄럽고 야비하고 뻔뻔스러우며 노골적인 악의와 분노를 품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목적 역시 그런 성격과 잘 어울린다. ‘화씨 9/11’의 의도는 현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모욕하고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지 폭로한 뒤 곧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보여주는 이집트 관광 다큐멘터리와 성격 자체가 다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보다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는 왜 싸우는가’나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에 가깝다. ‘화씨 9/11’은 당당하고 숨기는 게 없는 정치선전 영화다.
영화는 무어 특유의 야유로 시작한다. 무어는 온갖 코미디 도구들을 동원해 미심쩍은 선거로 당선된 부시의 무능력함과 게으름을 놀려댄다. 일단 관객들이 무어의 조롱에 익숙해지면,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비판의 문을 여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부시 일가족과 빈 라덴 가족의 밀착관계다. 물론 이 영화는 PD수첩이 아니므로 엄청난 적수여야 할 것 같은 두 가족의 밀착관계를 폭로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의 소재는 폭로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부시가 내세웠던 모든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열쇠다.
여기서부터 무어는 이라크 전쟁의 현장에서부터 자신의 고향 플린트를 오가며 얼마나 끔찍한 인권 유린이 일어나고 있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농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평범한 노동자 계급의 아줌마 라일라 보스콤의 서글픈 초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화씨 9/11’이 영화 예술가 무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로저와 나’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볼 수 있었던 자극적인 위트나 현란한 논리의 비약은 ‘화씨 9/11’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전작들과 달리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철저한 사실 검증을 거쳤고 논리 역시 비약 없이 잘 정돈돼 있다. 무어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어의 제1 목표가 걸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화씨 9/11’은 부시를 향한 전쟁의 제1 무기 이상은 아니다. 그의 무기가 과연 이번 선거에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두고 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