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 빌 2’의 연출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오른쪽)이 주인공 우마 서먼에게 연출될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며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다. 물론 이 영화들은 몹시 폭력적이고 잔혹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 무참히 살해당한 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며 자신의 힘만으로 원수를 처절하게 응징하는 얘기들이다. 실생활에서의 미국인들은 9·11 테러를 겪으면서 자신들을 이빨 빠진 호랑이로 여길지 몰라도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가족의 죽음에 광분하고 복수를 다짐한 뒤 2시간쯤 지나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당당히 ‘임무 완수’를 선언한다.
간단명료한 대답 원하는 시민들
‘복수표’ 영화들을 기획한 제작자들은 “이젠 때가 됐다”고 말한다. “9·11 테러 이후 문 밖에 나서기도 두려워할 만큼 공포에 빠졌던 미국인들이 지금은 복수 스토리에 목말라하고 있다”고 한다. ‘퍼니셔’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조너선 헨슬레이 감독은 한술 더 떠 “열정과 호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시대정신은 썰물과 밀물처럼 부침을 계속해왔다. 지금 우리는 열정과 호전성이 더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킬 빌 2’의 제작자인 로렌스 벤더 또한 헨슬레이의 얘기를 거든다. “실업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가는 의료보험료에 테러, 전쟁 등 갖가지 걱정거리를 껴안고 사는 일반 시민들은 매우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한 해답을 원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수표’ 영화들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영화 속의 복수가 ‘그들만의 복수’라는 것이다. 대리만족을 통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피범벅 잔치에, 그들만의 ‘임무 완수’로 끝나 영화 비평가들한테서 좋지 않은 평을 받는 것은 물론 관객들에게서도 외면당하고 있다.
4월9일 개봉한 월트 디즈니의 ‘알라모’는 개봉 주말 박스 오피스에서 9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알라모’는 디즈니의 올해 야심작 중 하나로 총제작비 1억4000만 달러를 투입한 대작이다. 1836년 벌어진 알라모 요새 전투 실화를 바탕으로 해 만든 영화다. 미국 역사에선 하나의 신화와도 같은 전투 얘기로 지금까지 10편도 넘게 영화로 만들어졌다.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는 원래 스페인 수도원이었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텍사스는 멕시코 영토가 됐는데 알라모 전투가 벌어진 1836년 당시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해 2월 말 멕시코의 대통령인 독재자 산타 아나 장군은 알라모에 진을 치고 멕시코군에 저항하는 미국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24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라모에 도착한다. 당시 알라모 요새 안에 진을 친 미국인들은 모두 190명이었다. 이들은 멕시코군의 간헐적인 공격을 13일간 막아내다가 3월6일 새벽 시작된 멕시코군의 총공격으로 전원 사망한다. 그리고 알라모 전투 6주 뒤 샌하신토에서 텍사스군 총사령관 샘 휴스턴이 이끄는 군대가 산타 아나 군대에 대한 복수전을 펴 텍사스는 독립한다.
그러나 영화 ‘알라모’는 허약한 각본에 엉성한 전투장면, 밋밋한 연기로 2시간10여분의 상영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재미가 없다. 결국 흥행에서 참패를 했고, 이 소식에 뉴욕 증시에선 디즈니의 주가가 2.1%나 떨어졌다.
영화 ‘알라모’의 주인공인 배우 제이슨 패트릭. 영화 ‘킬 빌 2’의 한 장면(오른쪽).
인기만화에서 스토리를 빌려온 ‘퍼니셔’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정부 비밀요원으로서 받은 훈련과 전투 경험, 그리고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가족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FBI 요원을 영웅 캐릭터로 내세웠다. ‘맨 온 파이어’는 전직 해병대원이 부탁을 받고 보호하던 어린 여자아이가 유괴되자 분노의 화신으로 변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전직 해병대원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여자아이를 통해 사람을 죽여온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따뜻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나름대로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너와 나 싸움 ‘선과 악’ 구분 뚜렷
‘킬 빌 2’는 복수를 위해 칼을 든 금발 무사 이야기로 지난해 ‘킬 빌 1’이 개봉됐을 때 스크린을 피로 물들이는 폭력성과 잔혹성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논란을 빚었던 작품이다. 결혼식 날 약혼자, 하객들과 함께 총에 맞아 쓰러진 임산부 신부가 4년 만에 깨어나 자신에게 총질을 한 두 암살객을 죽여버린 게 전편의 스토리였다면, 후편에서는 또 다른 두 명의 암살자를 마저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처치하라는 명을 내린 암살단 두목 빌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복수 시나리오는 할리우드가 수십년 동안 애용해온 소재다. 플롯에서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정도다. 그리고 티켓 판매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면 일반 관객들에게 그다지 대리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보복을 행하는 영웅 캐릭터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함으로써 보상을 얻는다’는 복수영화의 효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맨 온 파이어’를 각색한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언 헬게랜드는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경찰이나 정부의 손을 벗어나 불의와 부당함이 판칠 때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평범한 시민이 마치 영웅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며 “최근 영화들에선 복수의 이중적 의미에 대한 고민 대신에 ‘나는 복수를 할 만하고 너는 복수를 당할 만하다’는 식으로 선과 악이 뚜렷이 양분돼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