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서울 여의도 지하전력공동구에서 일어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큰 사진)과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화재 현장서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관들. 대형 재난 재해가 빈발하자 소방방재청 신설이 추진되고 있다.
반면 노대통령은 ‘거야(巨野)’가 존재한 16대 국회에 ‘행정자치부에 소방방재청을 둔다’는 조항을 넣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3월2일). 노대통령이 소방청 신설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당선자 시절인 지난해 2월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 중앙역 방화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전 국민을 놀라게 한 이 사건의 처리는 원칙적으로 따지면 대구지하철공사와 그 상위 기관인 대구광역시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워낙 큰 사건인 데다 대구는 노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취약한 곳이고, 또 대구지하철을 짓던 와중인 1995년 4월28일에도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났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특별재난지역 선포 외에 또 다른 무엇을 내놓아야 했다. 2001년 ‘9·11’테러가 있은 후 미국 정부는 국토안보부 신설이라는 수습카드를 내놓았다.
대구지하철 화재 이후 소방청 신설 급물살
이러한 사정을 아는 관계자들은 국가적인 재난과 재해, 그리고 테러 등을 종합적으로 예방하고 대처하는 기구로 소방청 신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사실 대구지하철 화재나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같은 대형 재난이 발생했거나 매미나 루사 같은 초대형 태풍, 그리고 3월5일의 중부지방 폭설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한 곳에 달려가보면 여러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로 인해 현장이 북새통을 이룬 경우가 많다.
소방과 경찰은 필수적으로 달려와 있고 적십자사와 병원 관계자, 군과 국가정보원, 건설교통부와 보건복지부, 지방자치단체와 NGO(비정부기구) 등 수십 수백개의 기관이 몰려 자기 중심으로 구조와 구호를 펼치다 보니 중구난방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구조와 구호는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희생자가 많으면 인근 병원의 병실 여유를 조사하고 각 병원에 대해서는 응급치료에 적합한 의사와 간호사를 긴급 호출하도록 요청해야 하는데, 이러한 일까지 신속하게 해내는 기관이 그리 많지가 않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현장 지휘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안기부나 중정 요원의 직급이 타 부처 요원보다 높았고, 군사정부가 이들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권한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문민정부 이후 안기부에 부여됐던 현장 통제 기능이 없어지면서 어느 한 기관이 책임지고 재해와 재난 현장을 지휘하는 시스템이 사라졌다.
따라서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을 계기로 현장을 통제하며 재해와 재난·테러를 예방하고 대처하는 소방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반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국의 국토안보부는 대통령 경호와 위폐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재무부 특별수사국(SS) 등 수사권을 가진 여러 기관을 흡수해 출범하였다. 때문에 소수의 전문가들은 화재 진압과 구조를 전문으로 할 수밖에 없는 소방청을 신설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내다보았다.
2004년 3월 폭설이 내려 마비된 고속도로(위)와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강원도. 이런 재해지역에서는 소방관보다 일반직 방재공무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올 3월 중부지방 폭설 같은 재해가 일어나면 고속도로를 담당하는 한국도로공사나 건교부가 제일선에 나서야 하고, 항공기 추락사고는 건교부와 지방항공청이 맡아야 한다. 유조선 침몰 같은 해양사고는 해경과 해양수산부가 전문기관이고, 폭발물을 이용한 테러 등은 경찰이나 군·국정원이, 홍수는 수자원공사와 건교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나서야 한다. 행자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조차 모두 대처하지 못하는 다양한 재해 재난을 민방위재난통제본부의 하위기구인 소방국이 소방청으로 독립해 담당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적은 특히 민방위재난통제본부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 이들은 “소방보다 넓은 의미인 방재청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두 대통령에 의해 소방청 신설이 거론되었던 터라 소방직 공무원들은 똘똘 뭉쳐서 “소방을 반드시, 그것도 앞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 ‘소방방재청으로 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 확대로 기능 강화될까 ‘아직은 의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를 만들 때 소방은 경찰청의 전신인 내무부 치안국 안의 소방과로 출범했다. 30년 가까이 경찰 부서이던 소방은 1975년 내무부로 들어가 소방국이 됨으로써 경찰과 작별했다.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내무부 치안본부(1974년)를 거쳐 1991년 내무부의 외청인 경찰청으로 독립했다. 현재 경찰은 전·의경과 해경을 합쳐 구성원 수가 15만명에 이르는데, 그 중에서도 순경 이상의 직업 경찰관 수는 9만여명에 달한다.
군에서도 6만7000여명의 해군과 6만3000명의 공군은 한 명의 대장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보다 인원이 많은 경찰이 대장에 해당하는 치안총감을 최고 지휘관으로 삼을 수 있었다. 대장과 동급인 치안총감은 차관급이므로 치안총감이 경찰청장을 맡는 데는 문제가 없다(중장은 1급, 소장과 준장은 2급 대우를 받는다).
지금 전국의 소방관 수는 2만5000여명에 그친다. 따라서 최선임 소방관이 맡는 소방국장에는 중장에 해당하는 소방총감이 취임해왔다. 지금까지 소방 공무원들은 1급인 소방총감이 같은 1급인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밑에 있는 것이 불만이었으므로 소방청 독립을 갈구했던 것이다.(경찰관 계급은 치안총감[대장]-치안정감[중장]-치안감[소장]-경무관[준장] 순으로 내려가나, 소방관은 소방총감[중장]-소방정감[소장]-소방감[준장] 체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소방청을 만들면 소방총감은 대장급으로 올려 청장, 소방정감은 중장급으로 올려 차장을 맡으며, 그 밑으로는 소방감을 없애고 소방차감(소장)과 소방부감(준장)을 두자는 안이 나오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규모에 비해 소방직의 계급을 너무 높인다는 강력한 비판을 불러왔다. 이 비판을 수용할 경우 소방총감은 그대로 1급으로 남아 있으므로 소방방재청장이 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하면 저쪽이 불만이고 저렇게 하면 이쪽이 불만인 묘한 구도 때문에 소방직 공무원과 방재 업무에 종사해온 비(非)소방직 공무원 간에 때아닌 자리 싸움이 일어나게 됐다.
이 싸움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제33조 7항에 ‘청장과 차장은 소방직과 비소방직 중에서 임명하는데 그 중 한 명은 반드시 소방직으로 한다’는 문구를 넣는 것으로 겨우 봉합됐다. 대장급이 없는 소방직 공무원으로서는 최소한 소방방재청 차장이 될 수 있는 길을 확보했고 이후 세력을 키우면 청장까지도 거머쥘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반면 소방국을 휘하에 거느렸던 일반직 공무원은 최소한의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 됐다.
소방국을 소방방재청으로 키우고 나눠먹기 식으로 자리를 분할하는 것이 개혁일 수는 없다. 이러한 조직 확대와 개편이 소방과 방재 기능의 강화로 직결될지도 의문이다. 그보다는 국정원 경찰청 군 건교부 도로공사 복지부 적십자사 자치단체 해경 해수부 등 재난과 재해 테러 임무에 참여하는 여러 기관을 유기적으로 엮을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더 노력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