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마지막 주말,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딸의 숙원 사업을 해결해주기 위해 용인에 있는 E놀이동산에 갔다. 1년 전 아빠와 함께 귀국한 큰딸은 그동안 한 번도 유명하다는 그 놀이동산에 가보지 못해 유치원 친구들에게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물론 도쿄 디즈니랜드에는 가보았지만, 이곳에 대해 모를 뿐만 아니라 소문도 듣지 못한 유치원 친구들 앞에서 도쿄 디즈니랜드는 ‘면피’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딸의 그런 ‘악순환’이 초등학교에서도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하려는 것이 그날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놀이동산에서 즐거워하는 딸의 모습은 바쁜 일상에 지친 필자에게도 큰 위안이었다. 때마침 벌어지고 있던 튤립 축제는 10여년 전 방문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꽃시장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좋은 계기였다.
그런데 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튤립을 구경하던 중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튤립 꽃밭의 구석진 곳 서너 군데에 팬지가 심어져 있는 것이다. 노랑과 보라색의 고운 팬지는 다른 장소였다면, 예를 들어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분이나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튤립 속에, 그것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몸을 숨기듯 공간을 메우고 있는 팬지는 왠지 초라해 보였다.
정치개혁 완수 화룡점정도 유권자의 책무
‘왜 튤립 화단의 구석에 팬지를 심어놓았을까’. 팬지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쉽게 시들지 않고 오래가며, 다른 하나는 값이 싸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의 눈에 이날의 튤립과 팬지는 부조화이자 ‘이가 빠진 백자’처럼 비쳤다.
범사에 99%와 100%의 완성도는 전혀 다르다. 중국 양(梁)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안락사(安樂寺) 벽면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넣자 그 용이 벽을 차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 최후의 1%는 사물을 극적으로 완성한다. 그러기에 이 1%는 혼신의 힘을 다한,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결정체다. 만일 이 1%의 노력이 없다면 그동안의 각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빚어진 갈등과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열린우리당도, 심각한 내분과 갈등을 겪고 있다. 또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전복하고자 매일같이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4월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할 것이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물갈이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국회가 개과천선한 국회, 기존의 국회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국회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무수한 개혁의 약속이 물거품되었고, 심지어 개혁을 주창하는 노대통령조차도 ‘부정’의 그늘에 한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주체임을 자임하는 열린우리당도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참신한 후보들이 줄줄이 떨어져나가고 상당수의 회색빛 인물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국민이 원하는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선거는 끝이 아니다. 선거는 시작일 뿐이다. 선거를 통해 물갈이라는 99%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 이후 지리하고 지난한 1%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그것은 정치개혁 완수라는 마지막 1%의 화룡점정의 순간까지 주권자가 조직된 힘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감시하고, 또 감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감시 없이 선거 후 만족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또 한번의 좌절과 허탈함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튤립과 팬지의 부조화, 이 1%의 노력 부족과 미완성은 필자의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그칠 뿐이다. 그러나 정치개혁에서의 1% 노력 부족은 한 개인의 아쉬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지막 1%를 위한 비타협적인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놀이동산에서 즐거워하는 딸의 모습은 바쁜 일상에 지친 필자에게도 큰 위안이었다. 때마침 벌어지고 있던 튤립 축제는 10여년 전 방문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꽃시장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좋은 계기였다.
그런데 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튤립을 구경하던 중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튤립 꽃밭의 구석진 곳 서너 군데에 팬지가 심어져 있는 것이다. 노랑과 보라색의 고운 팬지는 다른 장소였다면, 예를 들어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분이나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튤립 속에, 그것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몸을 숨기듯 공간을 메우고 있는 팬지는 왠지 초라해 보였다.
정치개혁 완수 화룡점정도 유권자의 책무
‘왜 튤립 화단의 구석에 팬지를 심어놓았을까’. 팬지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쉽게 시들지 않고 오래가며, 다른 하나는 값이 싸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의 눈에 이날의 튤립과 팬지는 부조화이자 ‘이가 빠진 백자’처럼 비쳤다.
범사에 99%와 100%의 완성도는 전혀 다르다. 중국 양(梁)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안락사(安樂寺) 벽면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넣자 그 용이 벽을 차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 최후의 1%는 사물을 극적으로 완성한다. 그러기에 이 1%는 혼신의 힘을 다한,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결정체다. 만일 이 1%의 노력이 없다면 그동안의 각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빚어진 갈등과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열린우리당도, 심각한 내분과 갈등을 겪고 있다. 또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전복하고자 매일같이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4월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할 것이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물갈이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국회가 개과천선한 국회, 기존의 국회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국회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무수한 개혁의 약속이 물거품되었고, 심지어 개혁을 주창하는 노대통령조차도 ‘부정’의 그늘에 한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주체임을 자임하는 열린우리당도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참신한 후보들이 줄줄이 떨어져나가고 상당수의 회색빛 인물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국민이 원하는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선거는 끝이 아니다. 선거는 시작일 뿐이다. 선거를 통해 물갈이라는 99%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 이후 지리하고 지난한 1%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그것은 정치개혁 완수라는 마지막 1%의 화룡점정의 순간까지 주권자가 조직된 힘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감시하고, 또 감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감시 없이 선거 후 만족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또 한번의 좌절과 허탈함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튤립과 팬지의 부조화, 이 1%의 노력 부족과 미완성은 필자의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그칠 뿐이다. 그러나 정치개혁에서의 1% 노력 부족은 한 개인의 아쉬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지막 1%를 위한 비타협적인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