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국영상점에서 바뀐 러시아 백화점 내부.
3월14일 러시아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러시아의 유력 일간지 이즈베스티아가 뽑은 1면 머릿기사 제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7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시킨 1억5000만 러시아 국민의 선택을 한마디로 나타낸 것이다.
1991년 사회주의 체제를 끝내고 민주화와 시장개혁을 진행해온 러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이번 선거 기간 내내 계속돼왔다. 정치인뿐 아니라 지식인들까지 이 논쟁에 가세해 격론을 펼쳤다.
2000년 집권한 푸틴은 지난 4년 내내 “구소련 시대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로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구소련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주도했던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비난에 앞장섰다. 소련 시절 저명한 반체제 지도자로 197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1921~89)의 미망인 옐레나 보너 여사가 그 중심에 섰다. 인권운동가인 보너 여사는 푸틴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사하로프 박사와 함께 반체제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85)은 푸틴 대통령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 대조를 보였다. 20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994년 조국으로 돌아온 솔제니친은 ‘서구와는 다른 러시아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세계관을 보여왔다. 서구 민주주의가 러시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 그는 푸틴 대통령을 격려하고 조언하기도 했다. 소련 체제 타도에 힘을 모았던 옛 민주화 진영이 이렇듯 푸틴 정권의 성격과 개혁의 방향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선 것이 흥미롭다.
옛 민주화 진영과 개혁 놓고 격론
푸틴이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대목은 체첸 침공과 언론자유 탄압, 정보기관 강화 등 세 가지다. 푸틴은 1999년 총리 시절 체첸 침공을 주도했다. 러시아군이 개전 후 한 달 만에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하고 친러 정부를 수립해, 10여년 동안 계속돼온 체첸 사태를 마침내 무력으로 해결하는가 싶었다. 체첸전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푸틴의 인기가 급상승해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체첸반군은 게릴라전과 테러로 지금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다. 4년여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10여만명의 체첸인이 희생됐다. 러시아군 전사자도 공식 집계만 2000여명에 이른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반군과 협상해 정치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라는 온건파와 반전론자들의 요구를 푸틴은 묵살하고 있다.
푸틴은 또 언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언론의 자유는 소련 체제 붕괴와 함께 러시아 국민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편 개혁정책의 두 축은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글라스노스티(개방·언론의 자유)였다. 후임인 옐친 대통령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몰락이 무제한적인 언론의 자유 때문이었다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 70년 만에 자유를 만끽한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세와 무책임한 폭로로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것.
옐친 정권 후반 개혁의 실패와 국정 파탄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뜨거워졌다. 이때 고르바초프 정권 당시 정치국원으로 2인자였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설계사’로 불렸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박사가 옐친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지금 마음놓고 옐친을 욕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옐친이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허용하지 않았다. 3대 전국 방송 중 유일한 민영 방송이었던 NTV를 사실상 국유화했다. 또 그에게 가장 비판적이었던 TV6을 폐쇄하고 이 방송이 사용하던 6번 채널을 스포츠 방송으로 만들어버렸다. 시보드냐(Today)와 노비예이즈베스티아(New Izvestia) 등 비판 신문도 강제 폐간시켰다. 이렇게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탓에 이번 대선에서 관영 방송은 일방적으로 푸틴에게 유리한 보도를 했고, 신문들도 감히 신랄한 비난을 하지 못했다. 선거 기간 내내 야당과 서방이 불공정한 선거라고 반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옛 소련의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실라비키’라고 불리는 공안기관 출신 인사들이 주요 요직을 독점하고 이들 기관의 권한이 강화됐다.
KGB가 주도한 보수파 쿠데타로 정치적 생명을 잃을 뻔했던 옐친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KGB를 분할하고 KGB 인맥을 약화시켰다. 옐친 집권 동안 숨죽이고 있던 KGB 인맥은 ‘옛 동지’ 푸틴이 크렘린의 주인이 되자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이에 과거 KGB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았던 보너 여사 등 민주인사들은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엄청난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의회 약화·언론 자유 제약 불가피
그러나 칼럼니스트며 방송진행자인 미하일 레온티예프는 “푸틴이 러시아를 ‘경찰국가’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그렇다면 소련 해체 후 계속됐던 혼란이 더 나았단 말이냐”고 맞받아쳤다. “자유와 민주주의 없는 안정은 원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따랐지만 고르바초프와 옐친 정부 당시의 혼란에 지친 러시아 유권자들은 푸틴에게 몰표를 던졌다.
푸틴 대통령의 집권 2기 프로그램은 10년 내 국내총생산(GDP) 2배 증가를 목표로 조세개혁 연금개혁 금융개혁 사유화 계속 추진 등 경제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부패청산과 행정개혁을 통한 관료주의 청산 등 국가 근대화도 ‘위로부터의 개혁’ 방식을 통해 진행될 계획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화와 시장개혁을 동시에 진행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 등은 권위적인 정치체제는 유지한 채 강력한 국가(당)의 주도로 경제만 자본주의로 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푸틴은 그동안 중국식 개혁의 장점을 눈여겨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표트르 대제.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를 서구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계몽군주다. 그러나 그는 절대왕정과 철권통치의 수호자였다. 러시아식 ‘위로부터의 개혁’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민주적인 지도자보다 표트르 대제 같은 강력한 ‘차르(러시아 황제)’형 지도자를 선호해왔다. 더 많은 자유를 줬던 고르바초프나 옐친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독재자’ 레닌과 스탈린이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푸틴과 러시아 국민들의 선택은 끝났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유보하고 강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통해 ‘강력한 러시아 재건’에 힘을 모으겠다는 것이다. 권력집중과 의회민주주의 약화, 언론자유 제한 등은 당분간 불가피해졌다.
강렬한 기대와 폭발적인 지지 속에 크렘린에 입성했던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이내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 돼 쫓겨나다시피 크렘린에서 나왔다. 임기 연장을 꾀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푸틴 대통령이 4년 후 어떤 모습으로 크렘린에서 나올지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