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콜라는 1999년 13.7%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며 펩시콜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경북 칠곡군 동명면 대구은행연수원.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북측 선수단을 응원하기 위해 남녘을 찾은 북녀(北女)응원단에게 가장 사랑받은 음료는 ‘콜라’였다. 한여름, 그것도 처음 맛보는 대구의 찜통더위를 식히는 데는 콜라가 안성맞춤이었던 것. 대회 기간 내내 콜라는 숙소와 경기장에서 북녀응원단의 필수품이었다.
연수원 관계자들은 “색다른 맛이 북한 여성들을 매료시킨 것 같았다”고 회고했지만 기실 북한에도 콜라가 있다. “자본주의 침투의 척후인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고 우리의 콜라를 마셔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북한은 1980년대부터 룡성콜라공장에서 콜라를 생산해 주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대회 초반 북녀응원단을 사로잡은 콜라는 ‘콜라독립 815’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한 범양식품의 815콜라. 범양식품은 민족주의를 건드리는 마케팅 컨셉트에 따라 북녀응원단이 머문 대구은행연수원에 냉장고를 무료로 빌려주고 콜라를 단독 납품했다.
7년 채 못 견디고 백기 … ‘희귀 제품’
하지만 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815콜라는 곧 복병을 만났다. 뒤늦게 코카콜라사가 음료를 ‘대대적으로’ 제공하며 815콜라에 맞불을 놓은 것. ‘한국산’ 815콜라와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의 맞대결은 결국 코카콜라측의 판정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북녀응원단이 ‘맛이 1% 부족한’ 815콜라를 제치고 응원도구가 든 가방 안에 앞다퉈 코카콜라를 챙겨넣은 것이다.
그로부터 7개월 뒤, ‘콜라 독립’을 외치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815콜라는 소리 소문 없이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815콜라의 모회사가 대형음료 업체들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최근 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토종콜라가 시장에서 스러지고 있다. 97년 이후 범양식품의 815콜라와 해태음료의 옐로콜라 등 4종이 연거푸 등장,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아성에 도전했으나 하나같이 지리멸렬한 것. 옐로콜라는 생산이 중단됐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세를 넓혔던 815콜라는 올 3월부터 농촌의 구멍가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희귀 제품’으로 전락했다.
815콜라는 한때 민족정서를 자극하며 전체 콜라시장의 13.7%(99년)를 점유하면서 폭발력을 발휘했으나 위기의식을 느낀 다국적 브랜드의 유례없는 물량·할인공세에 7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로열티 없는 토종브랜드라는 컨셉트와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호소가 소비자들에게 어느 정도 먹히긴 했지만 유통망을 장악한 ‘공룡’들의 벽을 넘기엔 자본력과 제품의 질이 크게 부쳤던 것.
범양식품의 광고 컨셉트인 ‘콜라 독립’은 단순히 마케팅 차원에서만 외친 구호는 아니었다. 반미집회나 시위가 벌어질 때 주최측이 815콜라에 음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시중에서 ‘815콜라=반(反)미국식 자본주의’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민족감정을 이용한 ‘유치한 상술’로 콜라를 팔아먹는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815콜라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건 ‘문자 그대로’ 코카콜라에서 ‘독립’해 보란 듯이 한국의 대표 콜라로 자리잡겠다는 것이었다.
815콜라는 코카콜라의 음료시장 지배 전략을 거스르고 싶었다. 코카콜라의 세계 제패 전략은 간단하다. 진출 초기엔 철저하게 현지화에 포커스를 맞춘다. 콜라는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99%의 ‘물+설탕’ 혼합물에 ‘1%의 비법’이 추가돼 제조되는데, 해외 진출 초기 코카콜라는 현지민들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99%’의 제조는 보통 보틀링파트너라고 불리는 현지 업체에 맡긴다. 67년부터 96년까지 지역별로 콜라를 생산해온 범양식품 두산음료 우성식품 호남식품 등이 바로 코카콜라의 보틀링파트너.
물론 코카콜라는 ‘1%의 비법’을 보틀링파트너에게 절대로 전수하지 않는다. 코카나무 잎사귀 추출물과 콜라열매를 핵심 원료로 한 일곱 가지의 비밀제조법이 있는데, 그 비법을 아는 사람은 미국 본사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지업체를 통해 시장에 연착륙한 뒤 코카콜라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계약을 중단하겠다는 암시를 주면서 보틀링파트너를 압박, 결국 보틀링파트너들을 흡수해 보틀링사업까지 직접 운영하는 것이다.
한국엔 현재 한국코카콜라㈜와 한국코카콜라보틀링㈜이 코카콜라를 만들고 있는데, 한국코카콜라보틀링이 바로 코카콜라측이 두산음료 우성식품 호남식품을 사실상 흡수해 96년 세운 회사다. 범양식품은 세 회사가 하나로 합쳐질 당시 코카콜라의 인수 제의를 거부했다. ‘1%의 비법’을 무기로 형편없는 가격으로 인수하겠다고 나선 코카콜라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범양식품은 밑으로 들어오라는 코카콜라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맞짱’을 떴다 녹아웃한 것이다.
기실 범양식품의 독립선언은 달걀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음료시장엔 유통망을 장악한 두 개의 ‘공룡’이 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판매하고 있는 롯데칠성음료가 그것이다. 음료시장은 대표적인 박리다매 시장으로 시장에 얼마나 많은 제품을 깔아놓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소매점에 납품하기 위해선 냉장고 업라이트쿨러 간판 테이블 파라솔 등을 끼워줘야 하고 편의점이나 할인점 등에는 마진을 최대한 낮춰 공급해야 자사의 물건을 진열할 수 있게 해준다. 코카콜라와 롯데칠성음료가 저가공세에 나서면 자본력이 떨어지는 군소업체들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롯데칠성음료는 업계에서 ‘미투(me too)의 황태자’라고 불린다. 군소업체가 돋보이는 제품을 만들면 이를 그대로 베껴 비슷한 제품을 만든 뒤 강력한 자사 유통망을 바탕으로 저가 물량공세를 펼쳐 군소업체의 제품을 고사시킨다는 것. ‘암바사’가 인기를 끌면 ‘밀키스’를 내세워 시장을 빼앗고, ‘니어워터’를 거의 똑같은 ‘2% 부족할 때’로 제압하는 등 롯데칠성음료는 성분은 물론 용기까지 거의 그대로 모방한 제품을 출시, 유통망을 무기로 군소업체들을 제압해왔다.
815콜라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때 롯데칠성음료가 판매하는 펩시콜라의 점유율을 위협할 정도로 판매량이 늘기도 했다. 하지만 점유율 상승은 오히려 부메랑이 됐다. 위기의식을 느낀 대형업체들의 할인공세와 이들의 지원을 받은 소매상들의 비토로 물건을 깔 곳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815콜라의 좌절은 ‘맛이 1% 부족한’ 탓이 적지 않았지만,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대형업체들의 견제와 과점적인 유통구조 때문이었다.
한편 현재 화의 절차를 밟고 있는 815콜라측은 화의가 이뤄지면 2005년 여름께부터 다시 한번 ‘독립전쟁’에 나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