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을 바라보는 할리우드의 시선이 무척 부드럽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영화에 그려지는 일본, 혹은 일본인의 이미지에는 강렬한 적대감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 일본이 무대이거나 소재인 영화에서는 그들의 시선이 눈에 띄게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곧 개봉될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는 19세기 말 메이저유신 직후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왕과 이에 저항하는 사무라이들 간의 대결과정에서 사무라이가 된 미국 장교의 얘기를 다룬다. 영화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는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일본말을 하는 등 자발적으로 ‘일본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서구인에게 주로 알려진 일본 사무라이의 잔혹한 면은 뒤로 숨어버린다. 대신 사무라이는 성숙한 인간의 한 전형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톰 크루즈는 일본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사무라이는 철학자이자 예술가”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킬 빌(Kill Bill)’(사진)이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도 일본 지향이 분명한 작품이다.
일본(인)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80, 90년대 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났던 일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무얼 보여주는 것일까. 무엇보다 ‘일본 위협론’이 사라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앞세워 금방 미국 본토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높던 때, 스크린 속의 일본은 음험하고 공격적으로 묘사됐다. 이 같은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90년대 초, 미국 사회의 ‘공일(恐日)’ 내지는 ‘반일(反日)’ 정서를 담은 영화들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대표적인 게 마이클 클라이튼 원작의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상대다. 10년 넘게 장기불황에 시달리는 일본에 겁먹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이 떠난 자리는 일단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조만간 새로운 ‘주인’이 앉을지(앉혀질지) 모른다. 그 유력한 후보는 단연 중국이다. 이미 미국 내에서는 중국 경계심리가 대단하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질서 유지에 가장 큰 장애가 중국이라고 보고 이미 견제에 나서고 있다. 새무얼 헌팅턴은 ‘문명충돌론’에서 서양문명을 몰락시킬 두 위험요소로 중국의 인구와 아랍의 종교를 꼽았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리에는 황화론(黃禍論)이라는 서구의 해묵은, 그러나 편견에 가까운 신화도 숨어 있다.
중국에 대한 서구의 관념은 일본에 대해 느꼈던 그것보다 훨씬 더한 위압감이 묻어 있다. 일본이 단지 20세기에 깜짝 출현해 반짝했던 한 에피소드 같은 존재였다면 중국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상대라고 할까. 동양의 중심으로서 수천년을 쌓아온 저력에다, 13억 인구에 감추어진 무한한 잠재력.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적과 마주한 것 같은 당혹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서구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흔히 나비효과를 설명하는 말에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미국 워싱턴에 폭풍우가 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베이징은 단순히 한 지명에 머물지 않고 굳게 닫힌 벽 너머 미지의 이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이라는 70년대 누아르 장르의 걸작 영화 제목도 어쩌면 이 같은 정체나 깊이를 분명히 알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빌려온 것인지 모른다. 젊은 시절의 잭 니콜슨이 우울한 사립탐정으로 나오는 이 영화의 배경은 로스앤젤레스다. 그러나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인도 나오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은 단지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죽음을 맞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왜 굳이 차이나타운이었을까. 감독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로스앤젤레스라는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에 만연한 부정과 협잡의 대척점으로서, 미지의 공간인 차이나타운을 설정한 것이라는 평자들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거인 중국의 부상이 뚜렷해질수록 세계 속의 ‘차이나타운’의 외연은 더 넓어질 것이다. 그와 함께 황화론이라는 정체불명의 유령도 스크린에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 듯하다.
곧 개봉될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는 19세기 말 메이저유신 직후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왕과 이에 저항하는 사무라이들 간의 대결과정에서 사무라이가 된 미국 장교의 얘기를 다룬다. 영화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는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일본말을 하는 등 자발적으로 ‘일본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서구인에게 주로 알려진 일본 사무라이의 잔혹한 면은 뒤로 숨어버린다. 대신 사무라이는 성숙한 인간의 한 전형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톰 크루즈는 일본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사무라이는 철학자이자 예술가”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킬 빌(Kill Bill)’(사진)이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도 일본 지향이 분명한 작품이다.
일본(인)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80, 90년대 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났던 일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무얼 보여주는 것일까. 무엇보다 ‘일본 위협론’이 사라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앞세워 금방 미국 본토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높던 때, 스크린 속의 일본은 음험하고 공격적으로 묘사됐다. 이 같은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90년대 초, 미국 사회의 ‘공일(恐日)’ 내지는 ‘반일(反日)’ 정서를 담은 영화들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대표적인 게 마이클 클라이튼 원작의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상대다. 10년 넘게 장기불황에 시달리는 일본에 겁먹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이 떠난 자리는 일단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조만간 새로운 ‘주인’이 앉을지(앉혀질지) 모른다. 그 유력한 후보는 단연 중국이다. 이미 미국 내에서는 중국 경계심리가 대단하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질서 유지에 가장 큰 장애가 중국이라고 보고 이미 견제에 나서고 있다. 새무얼 헌팅턴은 ‘문명충돌론’에서 서양문명을 몰락시킬 두 위험요소로 중국의 인구와 아랍의 종교를 꼽았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리에는 황화론(黃禍論)이라는 서구의 해묵은, 그러나 편견에 가까운 신화도 숨어 있다.
중국에 대한 서구의 관념은 일본에 대해 느꼈던 그것보다 훨씬 더한 위압감이 묻어 있다. 일본이 단지 20세기에 깜짝 출현해 반짝했던 한 에피소드 같은 존재였다면 중국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상대라고 할까. 동양의 중심으로서 수천년을 쌓아온 저력에다, 13억 인구에 감추어진 무한한 잠재력.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적과 마주한 것 같은 당혹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서구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흔히 나비효과를 설명하는 말에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미국 워싱턴에 폭풍우가 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베이징은 단순히 한 지명에 머물지 않고 굳게 닫힌 벽 너머 미지의 이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이라는 70년대 누아르 장르의 걸작 영화 제목도 어쩌면 이 같은 정체나 깊이를 분명히 알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빌려온 것인지 모른다. 젊은 시절의 잭 니콜슨이 우울한 사립탐정으로 나오는 이 영화의 배경은 로스앤젤레스다. 그러나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인도 나오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은 단지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죽음을 맞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왜 굳이 차이나타운이었을까. 감독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로스앤젤레스라는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에 만연한 부정과 협잡의 대척점으로서, 미지의 공간인 차이나타운을 설정한 것이라는 평자들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거인 중국의 부상이 뚜렷해질수록 세계 속의 ‘차이나타운’의 외연은 더 넓어질 것이다. 그와 함께 황화론이라는 정체불명의 유령도 스크린에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