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안대희 중수부장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기자들과의 회식 도중 나온 “중수부에 못 들어가 아쉽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한 특수부 검사의 대답에서도 확인된다.
“아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으라고 했다. 검사들을 급하게 보강한 이유는 수사가 그만큼 힘겹다는 뜻이다. 현대와 SK 비자금 사건 때는 운이 좋았지만 계속 강공 드라이브로만 일관하고 있으니 어떤 모양새로 수사가 마무리될지 걱정하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안 중수부장은 10월 네티즌한테서 ‘시민 안대희’라는 애칭을 부여받았다. 그런 그에게 최근 또 다른 별칭이 생겼다. 바로 ‘특검 안대희’. 여기에는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제 도입에 맞대응하라는 주문도 깔려 있지만 그보다는 ‘보다 특별한 검사’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설명이다.
현재 ‘시민이자 특검인 안부장’이 처한 상황은 만만치 않다. 경제계로 수사가 확대되면서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일각에서는 SK의 100억원대 비자금 수수 사실을 밝힌 것 같은 명쾌한 성과 없이는 실패한 수사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점. 문제는 정·재계는 물론이고 같은 검찰 내부에서조차 이 같은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정된 수사기간이 수사팀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고, 중수부가 12월경 ‘충격 발표’를 공언한 가운데 안부장을 향한 우려와 질시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사범위 커져 수렁에 빠진 검찰?”무슨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일주일간 무조건 쉬겠다” (안부장)
11월19일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장(오른쪽)과 현명관 부회장이 검찰을 방문해 수사를 조속히 마무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나라종금 수사를 통해 강력한 사정정국을 예고한 중수부는 대북송금 특검이 끝나자마자 현대와 SK 비자금 사건을 근거로 전격적인 불법대선자금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가 절정에 달한 지금 검찰의 수사범위는 여야 정치권과 5대 재벌을 포함한 20여개 기업에 이를 정도. 안부장은 사석에서 “수사 방향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굉장히 어려울 뿐 아니라 수사량도 많아 검사들과 직원들의 고생이 많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중수부의 일선 검사 수는 20여명 선. 결국 한 명의 검사가 한 개 이상의 기업을 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삼성 계열사와 현대캐피탈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통해 추가로 확보된 회계 관련 자료만 해도 사과박스 40여 상자 분량. 문제는 살인적인 비자금 관련 수사량 못지않게 현재 진행 중인 곁가지 수사에 따른 수사량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일례로 현대비자금 사건의 공소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대검 중수2과는 무기거래상 김영완씨 채권추적과 전두환 전 대통령 차남 재용씨 관련 수사에 더해 현대자동차 비자금까지 좇는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비리 특검을 통해 검찰을 견제하려는 한나라당의 공세 역시 정상적인 수사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또 민주당 대선자금은 중수부가 가장 오랜 기간 수사했는데도 최도술 선봉술 강금원 김성철씨 등 끊임없이 늘어가는 부산 출신 인사들에 대한 추가 계좌추적 부담만 늘어가고 있다. 더구나 서울지검에서 수사해온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의 관련 의혹을 산 썬앤문 그룹 문병욱 회장에 대한 수사에 중수부가 관여함으로써 수사의 예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 변수는 사정정국을 지탱할 소재가 고갈될 경우 맞게 될 역풍. 검찰은 SK 비자금에 대한 수사 이후 사정에 대한 국민들 관심이 한풀 꺾이고 대신 경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데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내년 초 시작될 총선정국은 수사가 더 이상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검의 한 수사관은 “명확한 마스터 플랜 없이 가지치기 방식으로 수사를 확대했기 때문에 안부장의 휴가가 번번이 연기됐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재계 수사 어렵다 어려워”제보에 절대적으로 의존, 소환조사의 어려움, 강력한 로비 …
SK 비자금 수사를 급진전시킨 내부 제보자가 여타 기업에서도 나올 것인가. 검찰이 추적중인 5대 재벌을 포함한 20여개 기업 수사의 후폭풍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검찰은 SK 비자금 수사가 쉽게 풀린 것이 기업지배구조와 관련된 분쟁 덕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이인규 서울지검 금융부장은 SK그룹 회계자료를 모아놓은 선혜원을 급습해 결정적 단서를 확보했다. 이는 관련자료를 폐기하기 직전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회장의 갈등 속에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임원급 인사의 신속한 제보에 따른 개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치인 소환조사와 달리 경제 관련 수사가 어려운 까닭은 관련자 소환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생기는 경제적 파장 때문이다. 주가가 검찰 수사 속보에 따라 급락하기도 하고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경제를 위해 기업 관련 수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검찰을 압박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하기 직전인 지난 9월, 전 검찰 모니터링 요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불법정치자금에 연관된 정치인과 기업인에 대한 수사에 있어 적절한 선에서 피의사실을 공표해도 좋다는 의견을 수렴한 바 있다. 그러나 기업 관련 수사에서는 국민정서보다 시장반응이 우선시된다는 데 검찰의 고민이 있다.
안부장은 “SK 주가가 수사 이후 5배가 올랐다”는 말로 우려를 일축했지만, 그 역시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을 통해 부지런히 경제 관련 정보를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검찰은 경제계 인사의 검찰소환과 출국금지 사실이 언론에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피 말리는 보안작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다 SK 비자금 수사가 6개월 이상 계속되면서 다른 기업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자료를 파기하고 심지어 임원급 소환조사에 대비한 도상연습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는 기업측의 정서도 수사의 걸림돌이다. H그룹 관계자는 “검찰이 경영환경을 전반적으로 바꾸지 못하는 한 돈을 둔 쪽에서도 신뢰를 지켜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했다.
안부장은 11월28일 기자 브리핑에서 주목할 만한 코멘트를 남겼다. “지휘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미 아랫사람(일선검사)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 검찰 내부의 중수부를 겨냥한 각종 압력과 인연을 앞세운 끈질긴 로비에 대한 강력한 맞대응인 셈이다. 지난 몇 주 간 검찰은 12월을 기대하라고 공언해왔다.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