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단식 중인 최병렬 대표가 생각에 잠겨 있다.
‘영남의 위기’ 감사팀 보고서 충격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텃밭이자 인물 중심의 투표 성향을 보이는 경북 북부지역. 감사팀은 이곳에서도 이변의 기운을 감지했다. 문제는 이웃한 지역구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빨간불 벨트’를 확산시키고 있는 점이다. 감사팀은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출마설이 거론되고 있는 우리당 ‘테크노크라트’ 그룹의 경쟁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 평가하고 그 가운데 일부 인사들의 영입을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감사팀은 ‘영남 불패신화’에 기대어 안일한 선거전략으로 내년 총선에 임할 경우 안방에서 허물어지는 처참한 상황을 맞을 수 있음을 엄중 경고했다.
11월26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 모습.
단식 중인 최대표를 찾은 사람은 12월1일 현재1000여명이 훨씬 넘는다. 11월29일 하루 동안만 300여명이 방문해 최대표를 격려했다. 이들 가운데 현역의원 및 정치지망생들은 눈도장을 찍기 위해 당사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격려 방문을 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최대표의 체력이 떨어져 일일이 이들을 맞을 수 없다”고 말한다.
12월1일 국회의장실에서 총무회담을 갖기 위해 모인 여야 총무들(위). 11월30일 최병렬 대표의 단식장을 찾아 위로하는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과 유인태 정무수석 비서관.
무엇보다 최대표의 당권이 몰라보게 강화됐다. 고질적인 약점으로 평가되던 ‘범주류’ 세력의 결집이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다. 강재섭 김덕룡 의원이 단식 첫날인 11월26일 누구보다 먼저 농성장을 찾은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들은 평소 최대표와 서 전 대표 사이에 서서 실리를 추구해왔다. 11월24일 의원총회(이하 의총)에서 “지도부에게 힘을 실어주자”고 앞장선 것도 강의원이다. 덕분에 격론이 벌어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총은 10여분 만에 기립박수로 끝났다. 최대표는 11월 이후 강의원과 서너 차례 조찬을 함께했다. 당내에서는 이번 단식을 계기로 ‘최병렬-강재섭-김덕룡’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지도라인이 구축됐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11월 중순 강의원과 조찬을 함께한 최대표는 ‘홍사덕 원내총무는 막후 협상, 이재오 사무총장은 전면투쟁’이라는 이원적인 당 운영지침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스템은 단식정국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동력으로 자리잡았다.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소속 인사들의 측면지원도 최대표의 ‘카리스마’를 키우고 있다. 이총장,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 김문수 대외인사영입위원장 등 재선 3인방은 11월22일 서울 종로의 한 한정식집을 찾았다. ‘호스트’는 이명박 서울시장. 4인의 공통점은 최대표와 엇박자로 나가는 홍총무와 악연 또는 대립관계라는 점이다. 이시장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 때 홍총무와 맞붙은 악연이 있고, 재선 트리오는 홍총무의 일방적 총무활동을 놓고 사퇴론까지 거론했던 강경파. 따라서 이날 저녁모임의 성격이 ‘홍사덕 손보기’라는 의혹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단순히 저녁 먹는 자리”라고 말했지만 강한 야당을 주창하는 최대표 ‘전위대’의 종로회합은 남다른 의미로 포장됐다. 이날 이후 재선 트리오를 감쌌던 불협화음도 사그라졌다.
최대표의 단식은 ‘딴 생각’을 품고 있던 소장파의 목소리도 제압하는 효과를 보였다. 11월25일 의총에서 오세훈,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은 최대표의 극한투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오의원과 남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가 단식을 한 마당에 힘을 모아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고개를 숙였다. 원의원만이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해야 한다”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지만 이틀 뒤 당기위원회 회부 얘기가 나오면서 족쇄가 채워졌다. 원의원은 반기를 든 대가로 “내년 4월을 기억하라”는 압박성 전화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또 지구당위원장직을 사퇴했던 일부 소장파 인사들 역시 “인기몰이를 중단하라”는 당중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별도 행동을 자제키로 했다.
최대표는 사실 오래 전부터 강한 야당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와 가까운 인사들이 중심이 돼 만든 ‘최병렬식 프로그램’도 거론된다. 11월11일 최대표는 5공 출신 H씨와 여의도 M호텔 일식집에서 조찬을 함께했다. “최대표가 이름값을 못한다”는 혹독한 지적이 난무할 때였다. 평소 최대표와 친하게 지낸 H씨는 5공 창당에 깊숙이 관여한 ‘창당 전문가’. 당내에서는 즉각 두 인사의 회동을 놓고 각종 해석이 나돌았다. 그 가운데 힘을 받은 분석이 당의 슬림화였다. 한나라당의 덩치가 크다 보니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이는 대여투쟁의 장애요소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념과 체질이 다른 인사들을 과감하게 솎아내고 명실상부한 ‘최병렬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슬림화의 핵심 내용. 이날 최대표가 H씨와 이런 의견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 그러나 최대표측은 창당 전문가 H씨와의 대화에 “창당 얘기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특검 부활을 외치는 최대표는 조만간 단식을 풀 것 같다. 측근 K씨는 “노대통령이 납득할 만한 국정쇄신책을 내놓기 전까지는 단식을 풀지 않겠지만 정치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최대표는 단식 후유증을 적지 않게 겪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당 밖의 시니컬한 여론이 부담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재의결하라”는 힐난의 소리가 한나라당 담을 타고 들어온다. 무엇보다 단식이 국회를 개점휴업 상태로 몰고 갔다는 비난이 따갑다. 절반의 책임을 져야 하는 노대통령도 65세 노인의 단식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당 김원기 공동의장은 1일 “(노대통령에게) 협상권을 위임받았다”며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했다. 최대표는 이런 단식의 막전막후를 놓고 이제 새로운 결단을 준비해야 한다. 당내 분위기도 끝까지 최대표 페이스대로 흘러갈지 미지수다. 일부 인사들은 최대표의 강경투쟁과 별개로 재의결 추진을 강조한다. 갈수록 재의결에 무게가 실린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단식은 단식대로 가고 재의결은 재의결대로 추진하면 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원내 제1당으로서 계속 국회 등원을 미루다가는 국회 마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역풍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대표는 새 지도부를 구성한 민주당을 유심히 지켜본다. 다행히 민주당은 특검 재의결 및 찬성을 당론으로 정했다. JP(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만나고 온 홍총무 말에 따르면 재의결에 대한 입장은 자민련도 같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12월1일까지 의원 외유를 중지하라”는 당 지도부의 사발통문을 받았다. 홍총무는 정몽준 이한동 의원 등 무소속 의원들과도 전화통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재의결하면 통과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선물했다고 한다. 11월20일경 전북 부안에 있던 민주당 정균환 원내총무는 홍총무의 간곡한 요청에 지역을 물리치고 서울로 상경, 공조 수위를 조율하기도 했다. 최대표로서는 명예롭게 회군할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